혼자가 된 발달장애인 인터뷰 2편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어서야 담담하게 할머니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시시때때로 할머니를 떠올리며 슬픔에 푹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 이제는 가슴 아프게 할머니를 보낸 시간만큼 할머니를 잃어 가슴 아픈 나를 돌볼 여유가 생겼다. 사랑하던 존재가 죽는 것이 두려워 곁을 내어주기 싫었던 마음이 열리고 나서는 뒤는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를 많이 만들고 있다.
돌아보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헤어질 준비는커녕 어디서 온 지 모를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등록금을 벌어야 했던 대학생이 누구를 돌보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끊임없이 상상하며 ‘할머니를 데리고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갈고리로 나를 묶어두었다. 나를 묶어두었던 순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던 가족을 먼저 보내고 살아내던 발달장애인의 이야기들이 마음속 비슷한 곳에 있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와 둘이 살던 당사자는 같이 일도 다니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한 아버지가 자신을 시설로 보냈지만, 한 집에 살기엔 답답하고 죽겠어서 뛰쳐나왔다고 했다. 이후엔 아픈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 공적인 기관의 지원은 지속되지 않았다. 끝까지 서로 곁을 지키다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당사자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당사자에겐 누구도 의사를 묻지 않았나 보다. 평생을 살던 집에서 친척집으로 가게 되고, 돈을 뺏기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당사자는 친척집을 나와 아버지와 살던 동네를 헤매는 사람이 되었다. 우연히 당사자를 알아본 주민이 돈을 빌려주고, 동네에 집을 계약할 수 있게 조력하면서 다시 익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리운 아버지에 대해 한껏 말하고는 금세 눈이 빨개졌다. 그리곤 분명하게 말했다.
“아빠가 보고 싶으면 하늘을 보지요.”
당시에는 활동지원서비스를 활용하여 혼자 살아가는 시간을 채우고 발달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에 부딪치고 있는 중이었다.
“(주민센터에서) 말도 없이 내 돈을 뺏어가서 화냈어요”
혼자가 된 그 이에게는 없었던 기관처럼 연락도 않다가, 일을 해서 수입이 생겼으니 수급비로 받은 돈을 다시 토해내라는 동주민센터에 화를 내셨다고 했다.
“(사람들과) 같이 탁구를 칠 거예요...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요.”
신뢰하는 사람들이라곤 한 손가락에 다 차지도 않았지만, 그 사람들 속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의지하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사람에게 사심을 섞어 질문했다.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한 친구가 있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남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혼자 처음 살 때. 몸이 아플 때...... 자유롭게.”
친척집이나 시설로 보내졌다가 부모와 살던 동네, 익숙하게 오가던 길로 돌아와 헤매던 것은 힘이었다는 걸 배웠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혼자가 되더라도 부러우리만큼 당당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장면을 함께하면서 나도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후에도 죄책감에서 나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몇 명의 상담사를 만나도 더 굳게 문을 걸어 잠 갔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혼자가 되어도 자기답게 살아가는 알록달록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마음속에 들여놓으면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게 된 것 같다. 삶의 경험과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서 힘들 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연습을 매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