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자유를 찾아 도망가고 싶었다.

by 이정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설의 집단감염 뉴스가 터져 나왔다. 노인시설이든, 장애인 시설이든, 대형 시설이든, 작은 시설이든 상관없이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설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설에는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의 분리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시설을 봉쇄하는 코호트격리가 내려졌다. 시설 문 앞에 찾아가 긴급한 분리조치와 탈시설 지원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그래도 닫힌 시설이 안전하다며 거세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당사자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곳도 없으니 행정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가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감염되더라도 일상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시설의 집단감염 현상은 그칠 기세가 없었고 시설 안의 사람들은 더 일상적으로 통제되었다. 정부는 장애인 감염병 대응 매뉴얼이나 코로나19 대응 지침을 계속 수정해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매뉴얼이나 대응지침은 지난한 투쟁이나 희생자의 죽음으로 한 줄씩 생겨났지만, 시설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마련되었던 조치들은 뭉텅이로 쉽게 사라졌다.

시설에서의 집단감염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무뎌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는 집단감염 시설들이 많아졌다. 오히려 집단감염이 발생하는 시설이 내 집 옆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인식들도 생겨났다. 시설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코호트격리를 금지하고 긴급한 탈시설을 지원해야 한다는 투쟁에도 꿈쩍 않던 정부는 이들을 제외한 ‘국민’을 보호했다는 K-방역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도시에서 흔히 보던 페스트탑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집단감염의 불안은 나에게도 깊이 찾아왔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폐가 안 좋아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던 큰 아이와 초등학교 입학식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 작은 아이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지역으로 이사 가신 부모님의 이사오라는 유혹이 아주 달콤했다. 나의 자유가 고파보니 그저 매일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불안에 휩싸이고 악몽을 꾸면서부터 새벽에 일어나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은 나를 붙잡고 거실 창밖을 바라보는 테이블에 앉아 깜깜한 새벽을 바라보며 마음을 쏟아냈다. 나에게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활동에서 도망가지 않은 것, 떨리는 목소리라도 낸 것, 어려운 일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나면 집 앞 산자락에 자리한 대형 시설이 보였다. 밤 8시면 모든 불이 꺼져 깜깜한 산속으로 사라졌던 시설은 새벽녘에는 산자락 밝히는 가로등불로 되살아났다.

동네인지라 아이들과 일부러 드나들기도 했던 시설이었다. 시설의 직원을 알기도 하고, 거주하고 있는 당사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사전에 구실을 찾아, 교육을 받고,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바쁜 직원들에게 ‘세수를 부탁하는 것이 사치’라면서도 언젠가는 시설을 나가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고개를 들고 보니 시설 앞에 구급차가 와서 빨간 불을 깜빡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유리창에 붙어 그 장면만 바라봤다. 만났던 그분은 안녕하신가 궁금했지만 가족이 아닌 나는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특별한 목적 없는 면회도 불가능했다.

어느 날부터 누군가는 줄 서서 구급차에 실려가는 아침을 바라보면서 감사일기를 쓰는 내가 비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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