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가까이 만나온 유가족이 있다. 우리는 ‘장애인 사망’이라는 한 줄의 단신 기사로 처음 연결되었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한 사람이 숨졌다는 짧은 기사였다. 코로나19 시기 장애인이 시설에서 사망한 많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잘 보이지 않는, 혹은 너무 많은 장애인 사망사건들 속에 눈에 띄지 않는 사건 중 하나였다.
유가족은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국가가 제공하는 활동지원 시간은 부족하고 가족들이 일을 하게 되면서 장애가 있는 형제를 지원할 수 없게 된 분이었다.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시설에 가족을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당사자는 글과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장애특성상 엎드려 계실 수밖에 없었던 분이 외상성 뇌출혈로 병원으로 옮겨진 지 10여 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는 군인 같은 짧은 머리의 영정사진(그마저도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과 검정 운동복, 복지카드가 전부였다. 장애당사자가 당했을 일들이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들어도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사건이 제대로 알려진 뒤, 대로변에서 열린 첫 기자회견 자리에서 유가족을 처음 만났다. 세상이 무너지던 과정을 가슴으로 울먹이며 증언하셨다. 학교를 갈 수 없었던 당사자를 집에서 지원하던 동생이었다. 동생은 형이 TV 보기를 즐기고, 책장을 넘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며 울먹였다. 본인이 취업을 하게 되면서 형이 점심을 거르시게 되는 것보다 시설을 가시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고백하기도 했다. 시설이 허락하는 날만 형을 찾아가 잘 지내고 계신지 살펴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몸으로 집에 데려가 달라고 표혔했었다. 하지만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형을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의논하던 중에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더욱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그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느 곳이 어디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유가족에게 무엇도 확실히 답 해줄 수 없어 당황했던 시간들이 이어졌다. 국가와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기로 했지만 이긴 사례가 없었다. 시설에서 촬영된 CCTV 영상도 없이 명백한 책임을 증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송 과정에서는 가해자를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고, 정부와 시설이 한편이 되어 항변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장애인의 삶을 서류로 이해하는 재판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민간단체나 공익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들 외에는 국가 어느 곳에도 유가족의 분노와 당사자가 겪은 고통에 함께하는 곳이 없었고, 패소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부담만 가득했다.
계속해서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유가족은 ‘유가족’이라는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울먹이는 눈물로 안경에 습기가 가득해져 적어온 글씨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소송에 지더라도, 더 이상 시설에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된다. 똑같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고 시설은 그대로 운영할 수 있다.”라고 발언의 끝을 맺어 주었다. 그 긴 우여곡절을 지나오면서도 세상을 바꾸고,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유가족의 결심들이 철없이 부러웠다. 왜 나는 그러지 못했는가 하고 자책하는 시간도 있었다.
마냥 멋지기만 했던 유가족도 자신에게는 가혹했다. “어머니가 자신은 죄인이라고 얘기하십니다. 가족들 모두 그렇지요.”
그 마음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그 마음에 '죄책감'이란 이름을 붙이고 바라보게 됐다. ‘죄책감’이란 왜 이리도 질기고 잔인할까? 유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를 잃고 망연자실한 시간을 보냈던 과거를 돌아보았다. 사랑하는 이를 시설에 보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그 자리로 되돌려 두기에 충분했었다.
우리는 3년에 걸쳐서야 겨우 지방정부의 시설 관리 책임을 인정받은 소송을 마무리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책임은 인정받지 못했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된 그제야 당사자를 모신 추모관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때가 돼서야 '나도 할머니를 시설에서 잃은 죄인이었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당사자의 얼굴을 제대로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났다.
막상 만나 본 당사자의 모습은 기사 속 사진과는 다르게 엎드려 해맑게 웃고 계셨다. 요즘 내 옆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즐거워 보이시기도 했다. 내가 유가족에게 말했듯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정성스럽게 모신 납골함에 마치 저 세상 닿을 듯 붙여 둔 사진, 꽃다발, 과자가 보기 좋았다.
그제야 너무 오래 죄책감 속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관계가 보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하며 서로 위로가 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