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단골 카페까지 걸어가기

D-29. 이 간단한 미션을 수행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by 유랑

흐린 날이라 바다 물빛도 흐린 청록색이었다.

하늘은 구름에 뒤덮이고 수평선 쪽에만 겨우 한 뼘 정도 푸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서핑보드를 붙들고 물살에 출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키아토를 한 모금 마신다. 캐러멜 시럽이 잔뜩 든 아이스커피는 진하고 달콤하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일기를 쓸 준비를 한다.




열한 시에 일어나서 껍질째 자른 사과와 달걀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소파에 앉은 채로 광고뿐인 휴대폰 팝업과 카톡과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웹소설만 몇 편 읽었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일어나서 머리를 하나로 묶고 등판에 은색 선으로 요트 그림이 그려진 진노란색 윈드브레이커와 바지를 입었다. 발목에 검은색 줄이 있는 하얀 등산 양말을 신고 노란 고무창을 댄 흰색 트래킹화를 신었다. 오후 세시가 돼서야 준비를 마쳤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노트북이 든 파란색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커다란 부채모양 잎을 펼친 종려나무가 늘어선 화단을 지나서 잘 포장된 길을 걸었다. 가로수는 초록 잎사귀가 두터운 난대식물이었다. 너르고 한적한 도로의 중앙분리대에는 하와이처럼 키 큰 야자수 가로수가 줄을 이어 서 있었다. 저 멀리 도로 위로 푸르스름한 수평선이 보였다. 제주도의 구름은 수평선 가까이에 커다란 배처럼 둥실 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고통이 몰려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며 현재의 나도 곧 사라질 껍데기일 뿐이라고.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카페에 도착한 나는 관광객처럼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주문한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구름을 비집고 나오자 시야 가득 펼쳐진 푸르른 바다에도 황금빛이 어른거린다.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타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스물일곱 살에 만나서 사 년을 사귀고 이십 년 동안 함께 살다가 떠나간 그가 떠올라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꾸만 떠올라서 앞으로도 얼마나 슬퍼할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변까지 걸어가서 산책을 하다가 바닷가 카페로 가서 일기를 쓸 것.

이 간단한 미션을 수행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어떤 날은 햇빛이 뜨거워서, 어떤 날은 일어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에너지가 없어서 갈 수가 없었다.

오늘 드디어 혼자 노트북이 든 배낭을 들고 삼십 여분을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사실 집을 나서기 전에 조금 울었다.

가슴 아픈 기억이 곧 나이기에, 슬픔이야말로 남은 생을 함께 할 그림자 같은 친구이니까 새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노트북이 든 파란 배낭을 메고 깨끗한 양말을 신고 해변가 카페까지 걸어온 나를 대견해한다.

나를 위해서, 남에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서 글을 쓰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 쓰면서 놀 수 있다면 그때부터 내 안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집착이 고요한 침묵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그가 떠난 지 삼십구 일이 지났다.

그가 쓰던 방에는 빨래건조대를 놓았고 옷장에는 골프웨어를 걸어놓았다.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서 비취색 커튼과 하얀 망사 속커튼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간다.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뿐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기.

이혼한 지 한 달 아흐레만에 차를 놔두고 한 시간을 걸어서 해변가 카페에 갔다.

해변을 가득 메웠던 서퍼들이 서핑보드를 들고 백사장으로 올라와서 걷고 있다. 차츰 땅거미가 져가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내려서 노트북 화면에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갈색 종이 냅킨으로 액정을 닦은 후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집에 가면 차를 몰고 가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골프채를 크게 휘둘러 연습을 하고 또 잠에 들리라.

내일은 오늘 쓴 글을 고쳐 보고, 알맞은 제목을 달고 조금 더 고쳐 써서 보기 좋게 다듬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