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혼자 마시지 왜 굳이 청승맞게 혼자 나가냐는 질문에 ‘그냥 그 분위기가 좋아서’라고 말했다.
적당히 시끄러운 사람들의 기척과 음악 소리를 들으며, 남이 정성껏 만들어준 보기 좋은 요리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천천히 취해가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 그녀의 단골 술집은 가정집을 개조한 아늑한 분위기에, 바삭바삭한 미나리 딱새우전, 김에 싸 먹는 청어 알쌈 등 안주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키가 크고 긴 생머리인 L이 주홍색 불빛이 아늑한 높다란 바 테이블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도자기 잔에 전통주를 따르는 모습은 잡지 화보의 한 장면처럼 근사해보인다.
나는 술집에 혼자 가지는 못하지만 클래식 공연장에는 혼자서도 잘 간다.
운동복 차림인 평소와는 달리 기왕이면 우아한 점프슈트나 화려한 패턴 원피스를 차려 입고 간다.
날이 어두울 무렵 천장이 높은 로비를 가로질러서 묵직한 문을 지나 공연장에 들어가서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서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연주하는 조화로운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혼자서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 라흐마니노프 뮤지컬을 보러 갔었다. 신경쇠약에 걸린 갓 스물의 까칠한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의 능청맞은 연기, 그리고 피아노와 현악기들의 감각적이고도 화려한 연주에 푹 빠졌다.
빨간색 패턴 원피스를 입은 나에게 다들 어디서 그런 옷을 샀냐고 신기해했다. 치맛자락은 길고 폭넓어서 책상다리로 앉기에도 편하고 성큼성큼 걸어갈 때면 실크 속치마가 살짝 비치는 얇은 천이 기분 좋게 다리에 감긴다.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인 라흐마니노프를 맞이하기에 딱 어울리는 옷차림이라고 자신했다. 내 취향은 그런 건가 보았다.
여느 때처럼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저녁에 서귀포 관현악단 정기 연주회를 보러 갈 예정이다. 무료 공연 티켓이 몇 장 있으니 부담 없이 보러 오라고 근처에 사는 지인 몇 명에게 연락했지만 다들 내켜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하는 거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내가 혼자서 카페나 공연장에 가고 L이 술집이나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처럼. 그녀가 여태껏 한 번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잘 살아온 이유는 좋아하는 것을 혼자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나는 혼자서 카페나 공연장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즐기는 취미생활은 막연히 불완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나와 취향이 완벽히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타인에게 의존하다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사회초년생이던 이십 대 시절에도 혼자 여행을 다녔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가이드북을 손에 들고 기차나 버스를 갈아타며 걸었고 허름한 숙소에서도 푹 잤다.
그와 헤어졌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혼자서 공연장에 가는 나에게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 취향이 같은 내가 있으니 외롭지 않았다.
먼저 이혼을 겪은 적이 있는 지인은, 결혼 생활 동안 숨 막혔고 그토록 원했던 이혼이었는데도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왔던 이혼 쇼크가 석 달은 지속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 지 한 달 스무날이 지났다.
불화가 오래 지속됐던 탓인지 아니면 내 성격 때문인지, 나는 그보다는 빨리 이혼의 쇼크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일곱 시 반 공연을 보기 위해서 한 시간 전까지 준비를 마치려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