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마당 멍멍이랑 아침 산책
5. 시골 오두막집의 장점과 단점
아침에 눈 뜨기 싫은 날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기억의 편린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한꺼번에 떠오르면 눈앞이 하얘지고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무기력해지는.
나는 꽤 오랫동안 그런 상태였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촌언니랑 여행 왔던 제주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서귀포 오두막집에는 마당개가 있다.
베란다 문을 열면 바로 나를 향해 늘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잘생긴 보도콜리 이름은 ‘하치’.
개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내가 마당개 하치의 길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다 보면 가끔 미안해진다.
어떻게 주는 거 하나 없이 순수한 사랑만 받을 수가 있을까. 이래도 되는 건가 뭉클해졌다.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새로 핀 봉숭아나 메리골드를 찾노라면 마당 멍멍이 하치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울타리에 걸려있는 목줄과 멍멍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더니 대번에 눈치를 채고 다가와서 얌전히 목줄 채우기를 기다렸다.
울타리 문을 열고 나가서 하치랑 가벼운 산책을 했다.
귤밭에는 초록빛 탁구공만 한 여름 청귤이 여물어가고 있었다.
하치는 길가 나뭇잎과 풀잎 냄새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삼거리에 다다르자 마당에 묶여있는 큼지막한 도사견이 사납게 짖었고 하치도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맹견을 피해서 조금 더 가볼까 하다가 햇살이 뜨거워서 그냥 돌아왔다. 순둥순둥한 하치는 내가 산책을 데리고 나가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고집부리지 않고 잘 따라왔다.
오두막집에 돌아와서 일기장을 폈다. 일요일 하루,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볼 계획을 세웠다.
손으로 메모하듯 일기를 쓴 후에 에세이 한 편을 휘갈겨 쓰다시피 마음 내키는 대로 썼다.
그다음에는 여름철 장마에 눅눅해진 배낭을 꺼내서 몽땅 빨았다.
등산 배낭 세 개와 노트북 배낭 두 개 안에서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놓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충전선도 있었고 다 먹은 줄 알았던 라면도 있었다. 휴지조각과 과자 껍데기 같은 쓰레기도 많았다.
에세이를 쓰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다 쓰고 나서 마당에 빨래를 널면서 다음 한 주의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제주에는 가족도 직장도 없었고 아무런 일정도 약속도 없었다. 내 알람에는 아침마다 ‘앞으로 7일간 일정 없음’이 떴다.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완전 자유인 거였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된다는 거.
광복절에 좋아하는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에 영화 티켓을 예매했다. 집에서 일기 쓰고 집안일 다 하고 나서 심심해질 무렵인 오후 네시 반 타임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오후에는 간단한 일정이 있기는 했다.
도서관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강좌를 듣고 나서 저녁에는 트래킹 동호회서 산책 겸 가벼운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나는 혼자서 꽤 잘 노는 편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에서 혼자 살면서 수업도 듣고 동호회에도 나가니까.
후루룩 읽었던 철학서 ‘미움받을 용기’는 내 보기엔 그렇고 그런 ‘좋은 말씀’이었지만 나보다 나은 지성들의 해석에는 보다 더 깊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철학 수업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므로 불행지수가 높다는 점을 짚어 주었는데, 눈치를 아예 안 봐도 타인의 감정을 해치게 되므로 자신만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포인트가 좋았다.
앞으로도 일요일 오후 다른 약속 없으면 종종 들으러 올 것 같았다.
1부 수업이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에 강의실을 나왔다.
대학생이었을 땐 수업 듣고 시험도 쳐야 했고 시간강사로 나갈 때는 강의시간을 열심히 채우고 강의 평가도 받아야 했건만 학생도 강사도 아닌 일반 시민은 지각이나 결석을 해도 되고 사정이 있으면 수업을 끝까지 안 들어도 되었다.
강사님께 미안하기는 했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육지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부디 눈감아 주시기를.
낮에 걷기엔 너무 더운 여름 날씨라 저녁 산책이 땡겼던 동호회 회원들과 노을 질 무렵 바닷가를 두세 시간 동안 걸었다.
서귀포 중문 논짓물부터 대평포구까지 수평선에 황금빛으로 드리워진 노을은 점점 짙어지다가 천천히 밤이 내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풍경 사진을 찍었다. 코스를 다 걷고 나자 캄캄한 밤이었다.
동호회 회원들과 차가운 용천수에 맨발을 담근 채로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었다. 어두운 수평선에 한치잡이 배들의 불빛이 천 개의 별들처럼 반짝거렸다.
집에 돌아오니 마당개 하치가 울타리 너머로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나를 반겼다.
주인집 개랑 노는 즐거움이란!
하치가 꼬리를 흔들며 내 뒤에 딱 붙어서 집 안까지 졸졸 따라 들어왔다. 현관에 드러누운 마당개를 쓰담쓰담 해주고 씻으러 들어갔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소금기 머금은 바람을 맞아 푸석해진 머리카락과 땀으로 끈적해진 몸을 씻었다. 오두막집 반신욕조에 누우면 베이지색 편백나무 천장이 보였다. 나무옹이가 만들어낸 무늬는 불규칙적이고 신비로웠다.
이곳에서는 하고 싶은 것만 한다. 무더위를 날려버릴 재즈 음악과 에어컨을 틀어놓고 가끔 하치와 눈을 마주치면서 글을 쓴다.
오두막집 천장은 뾰족하고 매립등 불빛은 카페처럼 아늑하다. 서귀포 중산간 오두막집 잔디밭은 어둡고 고요하며 지붕과 유리 창틀은 견고하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밤 시간은 크림치즈 덩어리를 천천히 녹여 먹는 것처럼 농밀하고 진한 맛이 난다.
냉장고에서 간단한 음식을 꺼내먹거나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날 때마다 하치는 세모난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주인이 아닌 나를 따르는 하치가 애처로워져서 강아지 눈을 마주 보면서 앞발을 잡고 거칠거칠한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콘크리트 덩어리 육지에서 살던 시절의 괴롭고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소리 죽여 울었다.
하치는 나를 쳐다보다가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슬퍼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따라 마당개는 오두막집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현관에 드러누워 꿈쩍도 안 하는데 내보내려고 육포를 흔들어봐도 좋아하던 육포도 모른척했다.
하치를 책임져야 할 내가 주인이 아니라서 좋았다.
하지만 하치는 그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뿐, 울타리를 뛰어넘어 달아날 수도 있는 마당개에게 주인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