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혼한 날엔 전남편과 건배를!

근사한 술집에 가고 싶었는데 그가 원하는 건 허름한 동네 식당

by 유랑

아침 일찍 서귀포를 출발해 제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느라 조금 피곤했다.

이혼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동네 중국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그는 자기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그가 혼자 지내는 서른 평 아파트는 넓고 쾌적했다.

가구는 대부분 내가 직접 고른 것이었지만 파란색 패브릭 소파는 얼마 사용하지 않고 내가 제주도로 내려갔기 때문에 새것처럼 세련되고 낯설어 보였다.


안방에 들어가자 낯익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신혼집에 내가 혼수로 사 왔던 침대 프레임에 매트리스는 결혼 전 자취할 때 쓰던 걸 가져왔으니 그와 갓 사귀었을 때부터 이십 몇 년 간 사용했던 거였다.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까 편했다.

침구도 그와 내가 함께 쓰던 그대로였다.


이혼한 전남편의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기분은 뭐랄까, 무척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할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러운것 같기도 했다.

원래 나는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가서 이혼서류를 제출하고 그의 아파트에 들러서 가져갈 짐만 챙겨서 호텔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만난 그는 공항으로 나를 데리러 왔고 당연한 듯이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인 그의 아파트는 둘이서 지내기에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일부 가구는 심지어 내가 혼수로 해온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내가 호텔로 갈 이유가 없었나 보았다.

하긴, 관공서에 서류 한 장 냈다고 해서 그와 내가 하루아침에 전과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를 만나서 이혼절차 밟는 게 나름대로 긴장되고 힘들었는지 가져갈 짐 챙길 엄두가 안 났다.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아서 좀 누워있다가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를 확장한 거실은 꽤 넓어서 정면에 사 인용 소파를 놓고도 창가에는 그의 책상이 있었다.

그는 듀얼 모니터로 인터넷을 보고 있다가 내가 주방으로 가자 뭐 필요한 거 있냐며 다가왔다.


그가 살림살이를 배열한 방식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고 따지던 원칙 그대로였다. 분쇄원두와 모카포트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즐겨 마시던 예가체프 원두에 과테말라산을 섞으면 산미가 있어서 커피 맛이 더 진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저녁은 뭐 먹고 싶냐고 묻기에 살짝 장난기가 동했다.

이혼한 날 기념도 할 겸 젊은이들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소문난 비싸고 근사한 술집에 가면 어떻겠냐고, 내가 한턱 쏘겠다고 말했다.


지도앱으로 위치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걸어가기에는 멀고 택시를 타기에는 가까워서 싫은가 보았다.

그러면 배달은 어떠냐고, 매운 간장 찜닭을 한 번 시켜볼까 했더니 그냥 근처 식당 봐둔 곳이 있다며 나가서 먹자고 했다.


그가 데리고 간 식당은 예상대로 배 나온 중년 아저씨들이 주 고객이면서 술안주 할 만한 메뉴가 주종을 이룬 곳이었다.

저렴하면서 인테리어는 누추하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도 찾을 수 없는.


그는 매운 걸 좋아하고 달고 느끼한 음식은 질색이니까 닭볶음탕을 먹고 싶었을 텐데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간장찜닭을 주문해 주었다.

자작자작한 납작 당면에 건고추를 올린 찜닭을 기대했건만 막상 나온 음식은 냄비에 삶은 닭토막을 넣고 시커먼 간장물을 부어서 끓이는 방식이었다.

그는 소주를 나는 사이다를 마시면서 참으로 색다르고 신기한 요리라며 킥킥거렸다. 이런 찜닭은 처음 본다며, 떡볶이 같기도 하고 짜파게티 같기도 하고.


입맛이 무척 까다로운 그는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이 기대에 못 미치면 화를 냈는데 그날은 살코기가 푸짐해서 좋다며 자꾸 웃었다. 나에게 닭다리를 먹으라고 건네주기도 했고. 그는 날개를 좋아하므로 닭날개 두 짝은 혼자 다 먹으라며 나도 다정하게 권했다.


집 앞 식당에서 편안하게 소주를 마신 그는 기분 좋아 보였다. 왜 진즉 그렇게 안 해 주었을까. 함바집 같은 델 가느니 차라리 집에 있겠다고 짜증만 냈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그는 거실 소파에 파묻히면서 티브이를 틀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나에게는 와인을 내주었다. 새로 샀다는 65인치 티브이는 화면이 엄청나게 커서 마치 영화관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티브이를 배경음악 삼아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를 나눴다.

그를 처음 만났던 스물일곱 살 이후 육 개월이나 떨어져서 지낸 건 처음이었다. 누굴 만나서 뭘 했는지 말해주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던 대로 부드러워서 듣기 좋았다.



이혼한 날 그는 다정했지만 드디어 우리는 정식으로 헤어졌다.

가져갈 물건을 챙겨서 제주도로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밤마다 울면서 잠 못 이루더라도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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