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낮의 꿈, 데이트라는 건 뭘까요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그가 물었다.
경복궁 근처 현대미술관에 가보고 근처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가보면 어떨까, 내친김에 북악스카이웨이 드라이브도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제풀에 흠칫했다.
한 군데만 정하라고 버럭질이 나올 타이밍 이었다.
헌데, 반년 동안 어지간히 심심했던지 그는 다 가봐도 된다고 말했다.
화창한 겨울 날 그의 차 옆자리에 앉아서 북악스카이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내가 팔각정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는 주차장 앞에서 담배만 피웠다. 괜히 가자고 했나?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는 여기서도 주변 풍경이 잘 보인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벌써 싸우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쓸데없이 북악스카이에는 왜 가냐, 여기까지 와서 주차장에서 담배만 필 거냐 등등등.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와 집 밖에 나가는 건 질색인 그가 부부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밤에도 그는 거실에서 늦게까지 볼륨을 높이고 티브이 시청에 푹 빠지는게 낙이었고 나는 적막한 밤 시간에 글 쓰거나 책 읽는걸 좋아했으니까.
부부는 행동 양식이나 취향이 비슷해야 하는데 그와 나는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극과 극으로 달랐다.
미술관 가는 방법만 해도 나는 시내 구경하러 가는 거니까 지하철 타고 가자고 했고 대중교통이라면 극혐하는 그는 대뜸 공영주차장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십 년간 부부로 살면서도 나들이 한 번 못했던 우리는 이혼하자마자 미술관 데이트를 나섰다.
데이트가 뭘까.
아니,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일단 데이트라는 건 서로 호감 있는 남녀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달달한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재미없고 매력 없어서 돈과 시간이 아까우면 그걸로 끝이고.
그와 내가 부부였을 때는 서로 매력 없고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 데이트를 안 했나?
분명히 그런 것도 있었다.
자기 취향만 고집하는 데이트 상대는 매력 없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사이가 괜찮았을 때는 진짜로 이혼할 줄 몰랐으므로 앞으로 시간이 많다고 여겼던 것 같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데이트 한 번 안 하고 서로 무시하고 미워하면서 사사건건 싸우면서 살 거라고.
근데 남남이 된 지금은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고 마침 내가 이혼하러 온 김에 시간도 되니까, 그도 마침 시간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으므로 – 그는 나의 변화무쌍한 감수성을, 나는 그의 차분함을 좋아했다 – 사이좋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각자 취향을 절충해 가면서 데이트에 나섰다.
그는 미술관 근처 관공서에 볼일이 있는 척 주차를 했다. 나는 산책을 무척 좋아하므로 겨울바람 맞으며 그와 나란히 서울 시내를 걷는 것도 좋았다.
연말연시 미술관 근처 인사동에는 나들이객들로 붐볐다.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전은 애시당초 매진이어서 작품 관람은 못했지만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미술관 로비와 기념품샵에 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전환이 되었다.
골목길에 늘어선 가게들의 컨셉과 분위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세련된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들어가자고 했다. 처음 보는 색다른 메뉴들을 살펴보다가 스페셜 메뉴 일 인분과 음료만 주문해도 되냐고 물었다. 핸섬한 셰프가 기분좋게 그러라며 테이블 세팅은 이 인분 다 해 주셨다.
세 종류의 고기와 다양한 종류의 구운 채소들이 나왔다. 그는 고기와 채소를 일일이 나이프로 잘라서 내 앞접시에 조금씩 덜어주었다. 한 가지 요리를 반반씩 나눠 먹는 우리는 엄청나게 사이 좋은 중년 커플로 보였을 것 같다. 어제 이혼하고 오늘은 데이트한다면 너무 이상한가? 이혼 신청서에 찍은 법원 도장 잉크도 마르기 전인데? 하지만 너무 오래 끌어온 결정을 마침내 해치워버린 그와 나는 편안하다 못해 흐뭇하기까지했다.
점심을 먹은 후엔 그가 가고 싶어 했던 디자인 갤러리로 갔다.
조금 피곤해진 나는 일 층 소파에서 차 한잔 하면서 쉬었고 그는 혼자 돌아다녔다. 북악스카이웨이에서와는 정 반대 버젼으로.
관람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나는 로비에서 발견한 캡슐머신 위치를 알려주고 커피 종류도 추천해 주었다. 커피를 다 마신 후엔 별관으로 이동해서 나란히 서서 대형 컬러 화보를 한 장씩 넘겨보면서 킥킥거렸다.
푸르뎅뎅한 나체 사진이 잔뜩 있었는데 모델의 기막힌 표정과 적나라한 노출이 과연 예술적 감수성을 팍팍 자극한다면서.
그 다음은 카페에 갈 차례였다. 그는 이미 캡슐 커피를 마시지 않았냐며 태클을 걸었다. 그는 원래부터 카페 가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큰 머그잔에 따듯한 카페라테와 달콤한 케이크나 파이 같은 걸 먹고 싶었다.
내가 가고싶다고 우기자 그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사겠다고 하면서 나는 자꾸 웃었다.
그는 카페의 비싼 음료나 미술관 입장료를 무척 아까워했는데 와이프가 돈을 펑펑 쓰는 건 못 견딜 노릇이지만 남남인 친구가 인심을 쓴다면 기분 좋았을 테니까!
한겨울 낮 백일몽처럼 달달한 데이트를 마치고 다음날 나는 제주도로 돌아갔다.
서울은 너무 추웠다. 그의 아파트는 삭막한 도시에 있고 티브이 소리가 시끄러워서 나는 그곳에 오래 있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