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 흔하디 흔한 이혼사유 ‘성격 차이’

달달한 시간은 거기까지, 앞으로는 본인이 알아서 사세요

by 유랑

작은방 서가에서 책을 몇 권 뽑았다. 행거에서 옷도 몇 벌 가져왔다.

옷과 책을 캐리어에 차곡차곡 넣었다. 나머지는 그에게 다 버리라고 했다. 버릴 수 없는 게 세상에 있을까.짐을 내 손으로 다 정리하고 가야 하는데 분리수거일이 아니라서 내놓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섣달그믐날은 오름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백패킹을 하면서 설날을 맞기로 동호회 회원들과 미리 약속했다. 이혼하고 나서도 할 일이 있어야 하니까.


한 달 후 이혼법정에서 그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이 어쩐지 든든했다. 한 번이라도 다시 보는 것이므로.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음에 만나면 전날 못 봤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보러 가게 미리 예매를 해놓자고 했다. 호암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인상파 작품 전시도 볼만할 테니까 그것도 보러 가자고. 치열한 예매 경쟁을 뚫기 위해서 티켓오픈 시간에 알람을 맞춰놨다가 동시에 예매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와 결혼해서 저축을 하고 집과 차를 장만하기 위해서 애썼는데 이혼하고 나서 놀러 다니기 위해서 의기투합 하는구나.

그는 새 차를 산 기프트로 해비치호텔 식사권을 받았는데 어차피 같이 갈 사람도 없으니 한 달 후 이혼수속 끝나고나서 같이 가자고 했다.

허름한 동네 식당만 고수하던 그와 이혼하고 나니까 소원대로 근사한 레스토랑에도 가볼 수 있겠네.

그에게 고맙다고 손을 흔들면서 공항으로 떠났다.


이혼하기 직전 가을과 겨울에는 캠핑을 자주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와 헤어지는 게 괴로웠다. 내가 우겨서 헤어지기로 해놓고도 마음이 너무 아파서 집에서 편안하게 잠들지를 못했다. 텐트를 지고 가서 추운 데서 노지 캠핑을 하거나 동호회 회원들과 날짜가 안 맞으면 혼자 해변가에 낡은 SUV를 세워놓고 차박이라도 했다. 뭔가를 해먹을 만한 기분도 아니어서 동호회 분위기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제주 자연 속에 있으면 딴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쐬면서 장거리 트래킹을 하거나 눈 쌓인 오름에 박배낭을 메고 올라가면 지나온 과거가 꿈만 같았다.

한겨울 바람에 들썩이는 텐트 안에서 덜덜 떨면서 양손에 핫팩을 꼭 쥐고 침낭 속에 들어가면 닥쳐올 외로움이나 슬픔도 두렵지 않았다.

동호회 회원들께서도 다들 좋은 분들이셔서 버너에 고기를 굽거나 어묵탕을 끓여서 먹어보라고 권하면서 내 표정이 자꾸 어두워지더라도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모른 척 넘어가 주셨다.

섣달그믐에도 백패킹을 하다가 오름 꼭대기에서 이사 갈 집을 골랐다.

서귀포 중산간에 위치한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이런 데서 살 수 있을까 긴가민가하다가 백패킹 동료분께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정말 좋다고 감탄을 연발하셨다. 내심 너무나 마음이 끌렸으므로 눈 질끈 감고 그냥 질러버렸다.


그는 오피스텔 연세 계약을 연장하기로 하고서 또 이상한 변덕을 부린다며 짜증을 했다.

그와 같이 살던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내기 힘들어서 떠나는 마음을 그가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 그가 신경 쓰이지 않도록 알아서 하겠다며 사과만 했다.

그가 화를 내봤자 이제 내 남편이 아니므로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내 마음 몰라준다며 서운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나를 걱정해서 안전하게 지내던 오피스텔에서 계속 지내기를 바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나에겐 도시의 아파트가 어울리지 않았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면서 이 세상은 원래부터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라고 여겼던 나는 제주도로 내려와서 무거운 슬픔을 내려놓았다. 슬픔은 마냥 고통이나 괴로움이 아니라 그럭저럭 지낼만한 친구가 되었다.


혼자 이삿짐을 옮기면서 힘들고 머리 아프고 복잡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모두 다 해치웠다. 집주인이 집을 팔았다며 잠수를 탔는데 끝까지 추적해서 보증금을 받아냈고 새로 구한 세입자에게 가구도 몽땅 넘겼다. 오두막집은 풀옵션이었으므로 내 낡은 SUV로 여러 번 나눠서 짐을 날랐다.




서귀포 오두막집은 푸릇푸릇한 잔디 마당이 아름답고 조용했다.

아침이면 설산에 올라가서 트래킹을 하고 저녁에는 혼자서 책을 읽었다.

가끔 그와도 연락했다. 이사는 잘 끝났고 이건희 컬렉션 예매에 성공했다거나 레스토랑 예약시간을 언제로 할지 등등 별 것 아닌 용건이었다.

한 달 후, 생일을 사흘 며칠 앞두고 나는 이혼법정에 출두하기 위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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