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설산에서 보냈던 예측 불가능한 하루

그가 나에게 빡쳤던 포인트와 내가 그에게 좌절했던 포인트

by 유랑

제주는 치명적인 팜므파탈처럼 때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다.

그곳에서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육지에서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제주에 연고가 하나도 없으므로 트래킹 동호회에서 만난 분들이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동호회 분들은 직장 발령을 받아서 온 가족이 내려 온 분들도 있었고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를 하러 온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가 고향인 제주도민이나 제주살이를 결심하고 혼자 내려와서 현지에서 직장을 구한 분들도 많았다.


자주 얼굴 보다 보면 가족관계나 사생활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가족관계를 얘기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사람들 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혼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가는 길 아니면 백 프로 헤매는 구제불능 길치인 데다가 혼자서 걸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되도록 과묵한 트래커들을 선호했는데 그중 한 명이 H였다.


여름날 폭풍우 치던 날에도 비옷을 입고 트래킹을 강행한 인연으로 그와는 트래킹 모임에서 만날 때면 따로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며칠 전에 올라갔던 눈 내린 한라산이 너무나 멋졌다며 내가 계속 감탄을 해대자 그는 한라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며 다음에 갈땐 같이 가자고 했다.

어리목에서 만나서 윗세오름까지 갈 때만 해도 오르막길에서 보조를 맞추며 올라가느라 힘들기만 할 뿐 별 생각이 없었다. 날씨도 화창해서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눈이 반짝이는 설산은 한라산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봤던 에베레스트 산 같았다. H에게 '내 말이 진짜지?' 하며 으쓱해했다.


윗세오름을 찍고 남벽분기점까지 가서 돌아가야 하건만 내 불치병인 정처 없는 방랑벽이 튀어나왔다.

되돌아가지 말고 돈내코 코스로 곧장 내려가면 어떻겠냐고 머뭇거리며 H에게 물었다. 거기가 설경이 더욱더 멋지다고. 인적 없는 돈내코 설경이야말로 한라산 설경 중에 으뜸가는 설경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우리는 둘 다 어리목 주차장으로 돌아가야만 차를 찾을수 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이 포인트가 바로 전남편이 된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참고 참다가 빡쳤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H는 선선히 한 번 가보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내코로 내려오는 길은 한라산 코스 중에서 가장 길다. 갓 내린 새하얀 눈을 보고서 평소 해보고 싶었던 짓을 또 하나 했다. 등산용 컵에 차가운 생수와 인스턴트 커피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눈 한주먹을 소담하게 올린 특제 한라산 설빙 아이스아메리카노 만들기.

그에게도 한 번 마셔보라고 권하자 H는 망설이지 않고 눈으로 만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미세먼지나 중금속이 들었을지도 모르므로 전남편이라면 치를 떨었을 텐데.

H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뛰듯이 산을 내려왔다. 그는 마라톤까지 나갔던 러너이므로 나와 보조를 맞추는 것쯤 문제없었다.

돈내코 코스를 다 내려오자 두 번째 문제가 현실로 닥쳤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어리목까지 가기로 했는데 둘 다 지갑을 안 갖고 왔던 것!

택시를 타고 가야 하나? 카카오 예상 택시비 오만 원은, 한순간 변덕을 부린 대가로 무척 적당하다고나 할까.


택시비가 아까웠던 나는 잔머리를 굴려서 스마트폰에 카카오 선불교통카드를 다운받았다. 그와 나는 버스를 갈아타고 어리목 근처 정류장까지 가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택시 기사분들은 아무도 날이 저물 무렵에 눈 내린 어리목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카카오택시 요금 팔천 원 거리를 프리미엄 택시기사들은 오만 원까지 불렀다.

이럴 거면 차라리 돈내코에서 택시를 타고 편하게 올 걸.


프리미엄 택시라도 불러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근처를 지나가던 맘 좋은 기사분이 일반 요금으로 태워주셨다. 어리목 주차장에서 그와 나는 사이좋게 헤어졌다.

며칠 후 그가 술 한잔하자며 연락해 왔다. 마침 가볍게 취하고 싶던 날이라 별생각 없이 나갔다.

그는 무척 과묵해서 대화 자체가 잘 안 되므로 그냥 혼자 걷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는데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수다스러워졌다. 어렸을 때 얘기도 하고 가족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집을 나오게 된 과정도 털어놓았다.


술이 더 들어가자 그는 사실 동호회 활동도 할 형편이 안 된다고 말했다. 돈만 많다면 더없이 행복할 텐데,라고 한탄하더니 혹시 여유가 된다면 돈을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모임 때 사람들 밥을 다 사고 싶다며 끝까지 우겨서 계산을 다 하던 모습이나 평소 유명브랜드 옷차림으론 상상할 수 없는 남모를 사정이었다.

그 후 H와는 연락이 끊어졌지만 태풍 왔던 날 위험한 해변가로 나와서 함께 걸었고 설산의 눈으로 만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원샷했던 그를 가끔 생각한다.


이제는 전남편이 된 그는 아내인 나를 평생 책임져야 했으므로 본인이 싫은 건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다. 한 번 변덕을 받아주면 앞으로도 내가 계속 당연하게 여기고 요구할까 봐 불안해서.

하지만 잠깐 스쳐 지나간 H는 싫으면 안 보면 되는 사이므로 설산에서 돈내코로 한 번 내려가자 보자고 했다. 지갑도 안 갖고 온 주제에 엉뚱한 길로 내려왔던 대책 없던 그와 나를, 그럼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도 별 탈 없이 보냈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한다. H는 술 취하자 ‘돈만 많으면 당연히 행복하죠’라며 확신을 담아서 말했는데 그가 보기에는 가족도 없이 떠도는 처지인 내가 별로 불쌍한 사람은 아닌가 보았다.




제주는 관광지이고 옷차림이 화려한 관광객들은 즐거워 보인다.

나도 관광객처럼 약간 들뜬 채로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전남편이자 육지 친구가 된 그는 도시에서 예측가능하고 안정된 일상을 차분하게 보내는데, 어쩌면 그와 나는 견우직녀처럼 일 년에 한 번만 보는 게 나은 인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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