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남편과 제주도에서 여름휴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화상아
장마가 한창인 칠월 말 화요일에 그가 내려왔다.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한 달 후 이혼확정절차도 밟느라 수도권에 갈 때마다 나는 그의 아파트에서 편하게 지냈는데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여름 휴가는 제주도에서 보내라고 했었다.
안 될 것 없지, 에어컨이 없는 아파트에서 무더위에 지친 그가 진짜로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거였다.
그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면서 걱정이 앞섰다.
기분 나쁜 일 있어도 사나흘 후 돌아갈 거라면 대충 넘어가겠지만 오래 붙어 있으면 반드시 싸울텐데, 얼마나 있을지 몰라서였다.
마음속으로 일주일 마지노선을 정했다.
이혼하고 나니깐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던 그에게 결혼생활 내내 제대로 해준 게 없었다. 일주일만이라도 다정한 전 여친(?)으로 여름 휴가를 즐겁게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저렴한 항공권을 찾다가 식당이 문 닫은 시간에 도착했다면서 미안해했다.
제주시 외곽의 새로 생긴 식당까지 찾아가서 멀건 콩나물국 같은 해물뚝배기와 고기가 몇 점 없는 갈비찜을 먹었다. 그래도 밑반찬은 맛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예전같으면 이따위 식당을 고른 나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왔을 거고 나 또한 지지 않고 대판 싸웠거나 혼자 그를 원망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텐데.
그는 내 오두막집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거실 소파 티브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침실에, 그는 거실에 각자 떨어져서 둥지를 틀었다.
일기예보는 열흘간 비였다. 그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거였다.
그는 티브이 보면서 편하게 뒹굴거리는 걸 좋아했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피곤해했다. 그걸 잘 알므로 나는 이번에는 나대로 내 할 일 하면서 그가 원하는 것만 같이 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은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해가 나왔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기업 홍보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제주도 해변 사진이 몇 장 필요했다. 긴 장마로 날씨가 내내 흐려서 사진을 못 찍고 걱정하던 참이었다.
집 근처 중문색달해변에서 한 시간 정도 사진을 찍으러 나가려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도 물놀이도 할 겸 잘됐다며 같이 가자고 나섰다.
알록달록한 피서객들로 붐비는 해변을 돌아다니며 형광색 보드에 올라서 파도 타는 서퍼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파도에 발 담그며 해수욕을 했다.
혼자서 물놀이하는 건 지루했던지 어느 사이에 다가와서 내가 사진 찍는 걸 옆에서 구경하다가 불쑥 물었다. 카메라 성능이 구형 폰보다 낫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화상아'
대꾸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카메라 성능이 좋은 단말기로 바꾸고 싶다고 내가 말할때마다 그는 ‘휴대폰 카메라는 거기서 거기다'라며 말을 끊었으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라며 대뜸 새 아이폰을 내밀었다.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그가 신나게 내 아이폰을 건드리는데 나도 새 단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누르며 설명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다크모드가 되어버렸었다.
햇볕이 너무 밝아서 다크모드 화면은 메뉴바가 하나도 안 보였다. 재부팅하는 메뉴바도 안 보여서 껐다가 켤 수도 없었다. 이게 뭐냐며 둘이서 아이폰 욕을 하다가 어찌어찌 화면이 겨우 다시 켜졌다.
의지할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이렇게 힘든 일도 웃으며 지나가는데, 우리는 왜 헤어졌나.
처량한 마음을 숨기며 관광객처럼 해변을 거닐었다.
강습을 받는 초보 서퍼들은 모래밭에 앉아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능숙한 서퍼들은 파도가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서핑보드에 올라타고 멋지게 파도를 탔다.
한 여름의 뜨거운 모래밭에 앉은채로 그 장면들을 새 아이폰으로 계속 찍었다.
내가 해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조용히 혼자 놀았다.
나도 그의 옆에 다가가서 나도 한 십 분쯤 바닷물에 발을 담궜다.
해가 흰구름에 가렸다가 얼굴을 내밀었다 반복하면서 사진찍기 나빴다가 좋아지기를 반복했다.
수평선에서는 먹구름이 몸집을 부풀리면서 조만간 비를 뿌릴 것을 알려왔다.
그를 내 차에 태우고 단골 횟집으로 가서 기본 회를 주문했다.
그는 신선하고 양도 딱 적당하다면서 내 안목(?)을 칭찬했다. 밥을 먹으면서 최신 개봉 영화를 예매하고 영화시간이 될 때까지 함께 해안가를 산책했다.
젊은 시절처럼 들뜨거나 기쁘진 않았지만 한때는 가슴 졸이며 사랑했던 그와 이혼하까지 하고도 함께한, 무난하면서도 약간은 쓸쓸한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