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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ssboard Jul 12. 2024

대중목욕탕, 찜질방, 사우나 그리고

  출퇴근 지옥철의 숨 막히는 땀냄새와 머리가 띵해지는 사무실의 에어컨 그리고 요즘처럼 관절 사이사이를 뻐근하게 하는 장마철의 축축함이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하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아, 오늘 사우나 같은 데라도 가서 몸 좀 지지고 올까...’


  그 옛날 남탕, 여탕의 성역을 구분 없이 넘나들 수 있던 소위 미취학아동 시절 엄마에게 붙잡혀 들어간 그곳은 은빛 스텐 간판 위에 돋을새김 된 ‘○○목욕탕’이라는 금색 글자가 반짝이고, ‘목욕합니다.’라고 적힌 입간판이 입구 앞에 서있던 ‘대중목욕탕’이었다.

 

 주말 오전, 그야말로 최고의 피크타임에 들어간 욕장 내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탕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새파란 타일 위로 목욕물이 흘러넘치고, 미지근한 물온도에 못마땅한 할머니가 반쯤 해진 헝겊이 감긴 구형 가스밸브 손잡이를 돌리면 굵직한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탕 내부로 후끈하게 퍼져나갔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920507.html

  “어허, 나오지 말고 10분 동안 탕 안에서 꼼짝 말고 있어.”

  

  물이 뜨겁다고 칭얼거리는 내게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하는 수 없이 다시 탕 안에 들어가 때를 불린 뒤, 시커멓던 팔꿈치와 무릎이 벌게지도록 이태리타월로 박박 밀리고는 휴게실 냉장고에서 삼각 비닐에 담긴 커피우유를 하나 꺼내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매달 한 번씩 치르는 중대 행사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신축 아파트 단지 근처나 시내 번화가의 빌딩 같은 곳을 중심으로 ‘찜질방’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목욕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00% 참나무 숯가마, 최대 규모의 시설’ 등의 캐치프레이즈들을 내걸고 자수정 사우나, 아이스방, 산소방, 식당, PC방, 헬스장 등을 구비하고 심지어 중앙 홀에 설치된 무대에서 주기적인 공연과 경품추첨 행사까지 진행하는, 과장 조금 보태서 로마시대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의 프리미엄 레저시설로 진화한 목욕탕은 드라마 같은 매스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며 한동안 온 가족의 휴식을 책임지는 오락시설이 되었다.

출처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1246000Y

  하지만 점차 각 가정의 목욕시설이 개선되고 집마다 하나씩 있던 욕조마저 서서히 자취를 감추면서 전통적인 ‘목욕’ 문화가 서양식 ‘샤워’ 문화로 바뀌게 되었고, 또 얼마 전 코로나 사태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다중이용시설이 영업에 타격을 입어서인지 요즘에는 찜질방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사우나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나도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목욕탕에 갈 엄두를 못 내다가 오랜만에 동네에 있는 사우나에 가보았는데, 샤워를 한 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자 근육이 이완되며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한동안 목욕탕을 가지 않다가 오랜만에 탕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아마 공감할 것이다. 그 쾌감은 온수샤워 따위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4016661

  그렇게 노곤해진 몸을 냉탕에 던지자 이번엔 아찔한 시원함이 덮쳐와 눈앞이 아득해지다가, 요란하게 사방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깔깔거리는 꼬마아이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되돌아왔다. 역시, 냉탕 벽면에 대문짝만 하게 적힌 ‘수영금지’ 문구 따위에 주눅 든다면 대한의 어린이가 아니지. 녀석, 기운도 좋다.


  참, 사우나도 빼놓을 수 없다. 문을 열자마자 몸을 덮치는 묵직한 증기를 가르고 들어가자 진한 쑥냄새가 밴 열기가 콧구멍을 때리면서 몸 안쪽 깊숙한 곳까지 퍼져나가 잠들어있던 장기들을 깨우고, 후끈거리는 두피와 얼굴 그리고 귀와 목 언저리까지 지압하면서 쓸어내리면 마치 머릿속을 무겁게 하던 스트레스들이 몸속 노폐물과 함께 쓸려 내려가는 듯하다. 그리고 마무리는 역시 냉탕으로 머리까지 입수!

출처 : https://biz.chosun.com/topics/topics_social/2022/04/30/3DAFXXVAFJBHFL6XX5Q65VODKA/

  그렇게 한참을 들락거리며 몸을 풀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욕장 내부의 배경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탕에서 올려다본 천장의 아크릴 판은 반쯤 깨져 날아가 있고, 건식사우나로 추정되는 방은 이미 오래전에 폐쇄된 듯 사용불가 딱지가 붙은 채 불이 꺼져 있었으며 냉탕의 폭포수 스위치는 고장이 나서 작동되지 않았다. 흔히 목욕탕의 전성시대라고 불리던 2000년대 초반으로부터 약 20년, 대부분의 목욕탕이 이처럼 조용히 사양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목욕을 끝내고 나서는 밤 10시의 적막한 라커룸 한쪽 구석에 이제는 어르신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세신사 아저씨들이 난닝구 바람으로 부루스타에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잔을 부딪치고 계셨고, 나는 갑작스레 붉어지는 눈시울이 호일을 두른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유 모를 쓸쓸함 때문인지 알지 못한 채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출처 :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20509580155

우리 몸은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세대교체 과정 중, 표피층에서 늙은 세포가 죽어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각질. 그것이 바로 우리가 ‘때’라고 부르는 것의 주성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것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다. 물건, 건물, 심지어 도시조차도 성장하고 변화하다 늙고 죽어간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과 함께, 그 위에 올려두었던 사람들의 추억도 함께 사라지겠지.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거스를 수 없는 섭리를 겸손히 받아들이며 다음 세대에게 묵묵히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이 아닐까.


  사우나 속에서 폐를 가득 채우던 쑥냄새는 다시금 지옥철의 땀냄새에 지워 없어지고, 온몸 깊숙이 스며들었던 탕의 열기는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에 또 식어 날아간다. 그렇게 서서히 관절 사이의 뻐근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는 또다시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아, 오늘 사우나 같은 데라도 가서 몸 좀 지지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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