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에서는 ‘독거노인’이 사회적 문제라고 말한다.
마흔인 나에게 그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혼자 사는 노인의 고립이 아니라,
이혼 후 아이와 단둘이 살아가는 나의 고립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나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
이혼 이후 그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기초수급을 받으며 버티는 삶,
근로무능력이라는 판정,
점점 줄어드는 인간관계.
고립은 환경이 아니라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이 없어 고립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닫혀 고립되는 것이라는 걸.
조울이 심했던 시기에는
감정이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그 결과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제는 반대로,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과거의 과열과
현재의 얼어붙음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도 아닌 어딘가에 서 있다.
젊었을 땐 당찼다.
거울 속의 나는 예뻤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지금은 기미가 얼굴을 덮고,
머리조차 감기 싫은 날이 많다.
이것이 우울일까.
아니면 지쳐버린 삶의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오늘은 날씨도 차갑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얼어붙는 느낌이다.
층간소음을 피해 카페에 나와 있다.
집은 쉼의 공간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공간이 된 지 오래다.
5월이면 또 이사를 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막막함이 앞선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작은 소망이 있다.
나는 언젠가 상담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
하지만 현실의 나는
수화기 너머 10분의 통화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날이 많다.
이런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상담은
완벽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 고립 속에 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오늘도 카페까지 걸어 나왔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얼어붙은 마음에도
아주 미세한 체온은 남아 있다.
고립형 인간이라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완전히 혼자는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