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탐방기

평화와 소망의 꽃 동백을 만나다.

by 장제모

선운사(禪雲寺)에 가고 싶은 마음은 오래 전에 갖고 있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기회를 맞았다. 필자가 재학 중인 ‘한국디지털대학교’(현 고려 사이버 대학) 법학과의 가을 MT 참석이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 가을 MT 공지가 있었을 때는 흥미를 두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어서는 아니나 환갑을 지난 나이라 젊은이들의 낭만 여행일 수밖에 없는 MT에 참여하는 것이 좀 그래서다. 공연히 젊은이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 펼침에 훼방꾼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 중 과 대표로부터 MT 시행을 알리고는 학업의 연장이라며 당연히 참석을 간주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러나 애초 관심이 없던 참이라 시원한 응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불참을 시사(示唆)하였다. 그러나 과 대표는 이러한 반응에 개의치 않고는 가능한 데로 부부 동반을 하고는 일정에 선운사 탐방이 포함되었다고 알려왔다. 젊은 시절 대학 생활을 하지 못했던 터라 대학생들의 MT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없지 않았으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적인 사정들로 긍정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상황을 만났다, 일정에 선운사 탐방이 포함된 점에다 부부 동반이라 한다. 가고 싶었던 선운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더하여 아내와 함께 가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로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간의 부정적 생각을 바꾸어 반기는 어조로 참가를 답하였다.


선운사는 그 창건역사 기록을 보니 흥미를 갖게 한다. 선운사가 있는 이곳 고창은 옛 백제 땅이고 당시로서는 백제의 적국(敵國)인 신라의 왕이 건립과 관련하였다고 하는 점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사료에 의하면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사람인 ‘검단 선사’가 건립과 관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를 증명해 주듯 ‘진흥굴’과 같은 ‘진흥왕’과 관련한 흔적이 여러 곳에 있다. 선운사 건립과 관련한 이러한 설은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필자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에 더해 그 사실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한다.

당시의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적으로 경계하는 사이였으며, ‘진흥왕’ 때는 신라가 가장 강성하던 시기로 백제와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이다. 다만 그 긴장 시기 이전에 고구려의 압박을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고는 힘을 합쳐 고구려에 빼앗긴 백제의 영토였던 한강 유역을 탈환(서기 551년)하면서 선린 우호를 유지했으나 곧 신라가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서기 553년) 두 나라는 다시 갈등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찰의 건립 시기는 ‘진흥왕’ 재위 때인 서기 540~576이란 기록이 있는가 하면, 비슷한 시기인 서기 577년(백제 위덕왕 24년) ‘검단 선사’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찰의 건립은 이 역사 기록들을 볼 때 사찰 건립과 관련한 두 가지 설은 모두 의문을 던진다. 즉 백제 인물인 ‘검단 선사’에 의한 건립이라면 ‘진흥굴’ 등 신라의 진흥왕과 관련한 흔적의 의미가 의문이다. 그런 한편 진흥왕의 연루도 역시 의문을 던진다. 두 나라가 갈등 관계인데 어떻게 백제 영토인 이곳에 신라 진흥왕이 관계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유추해 볼 수 있는 설은 ‘진흥왕’과 ‘검단 선사’의 협업이다. 즉 건립과 관련한 두 주체가 각각이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서기 577년 즉 ‘검단 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하였다는 설 이후의 통일 신라 때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므로 더는 추적이 어렵다. 다만 고려 공민왕 3년(서기 1354년)에 승려 ‘효정(孝正)’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는 기록과 조선의 승려 ‘행호극유(幸浩克乳)’가 확장했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사찰의 건립 시기는 고려 이전 즉 삼국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내가 선운사를 찾고 싶었던 것은 이와 같은 흥미로운 역사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선운사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소박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장년 시절 그러니까 시대적 아픔을 가지고 지내던 시절에 대중들의 가슴에 각자의 감흥으로 듣고 노래하던 한 대중가수의 노랫말의 접함이 그 동기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이 노래는 여러 감흥을 갖게 하면서 자연스레 그 노래의 주제인 선운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노랫말은 당시 유명세를 가진 가수 ‘송창식’씨가 불러 널리 알려진 ‘선운사’란 제명(題名)을 가진 대중가요이다. 이 가수가 부른 ‘선운사’는 필자 전후의 세대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노래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것으로 필자는 가슴에 담아두었었다.


‘선운사’의 노랫말은 이별이 주조(主調)로 하고 있으나 그것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이별에서 갖게 되는 감상(感想)을 노래함이 아니다. 이별이라는 인간적인 슬픔으로 만나게 되는 감정보다는 가슴을 두드리는 시대의 아픔들이 행간(行間) 곳곳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흥은 다분히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필자에게는 시대의 아픔이 있었고 그래서 강하게 어필했다. 노래를 만든 이도 부르는 이도 모두 시대의 아픔으로 고뇌했던 민중이고 필자와 그들 중의 하나다. 그렇듯 당시는 아픈 시대이고, 동백꽃은 힘없는 민중의 상징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 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 이예요”


동백꽃은 우리 민족의 서정(抒情)을 표현하는 꽃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선하고 약한 이를 대변하는, ‘순박(淳朴)’이고 ‘초라함’이란 단어로 집약되는 대상 즉 민중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는 문학 등 예술적 표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김유정(金裕貞)’의 소설 등 우리 문학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동백꽃은 힘없는 하층민(下層民)의 상징이 많다. 그렇듯 동백꽃은 서민(庶民)이란 의미의 민중(民衆)을 강하게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진 꽃이다. 동백꽃이 이별(離別)이나 슬픔과 같은 한(恨)이 많은 민중의 삶의 표징으로 이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필자 또래는 물론 그 이후 세대들도 잘 알고 있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는 이러한 나의 감상에 설득력을 보탠다,


"헤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가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 노래는 당시 집권 세력인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곡이 되기 전까지 국민가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가슴을 온통 긁었다. 노래를 부른 가수의 독특한 슬픈 음색(音色)이 노랫말과 어울려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렸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고 슬펐기 때문이리라. 고엽제 후유(의)증 원인으로 밝혀진 오렌지 탄이 매일같이 안개비처럼 내리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가난에 찌들어 청춘을 다 망가뜨려 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필자는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니까 꽃다운 청년 시절, 팍스아메리카나 구축이 야심인 미국의 요청으로 당시 정권이 설계한 맹호부대에 소속되어 하루의 안녕을 장담할 수 없는 전선에서 가슴을 앓던 시간이다.


남녘의 사찰에서 동백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백은 남쪽 지방에서 자생하는 수종(樹種)이고 따라서 그곳의 사찰들은 경내 조경수로 많이 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사찰과 동백나무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선운사의 동백은 다른 사찰과는 다른, 무언가의 의미가 있다. 우선, 이곳의 동백은 남녘의 여느 사찰은 물론 동백꽃을 앞세우는 여느 명소보다도 밀집도가 높고 그 규모에 더하여 생육 현상도 비교된다. 이곳 동백은 사찰 뒷산을 깜깜하게 채운 체 일정한 폭으로 가로로 길게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밀집대(密集帶)는 족히 삼만 평방미터도 더 되는 것 같다. 언제부터 이렇듯 동백 밀집대가 형성되었는지 모르나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뒷면에 좌우로 띠 두르듯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은 중생(衆生)들이 부처님께 평화를 구하는 시위(示威)이자 기도로 보인다. 부처님께서는 가엾은 중생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선운사의 동백꽃은 그 중생의 상징이다.

그런가 하면 선운사의 동백은 여느 지역의 동백과도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른 점이다. 대부분의 남녘의 동백은 이파리에 채 눈이 녹지 않은, 초록이 귀한 겨울의 끝자락에 꽃을 피우는 데 반해 선운사의 동백은 만산이 초록으로 뒤덮이는 4월에야 봄의 만개를 기다렸다는 듯이 꽃을 피운다. 이렇듯 선운사의 동백은 다른 곳의 동백이 모두 꽃잎을 지워버린 한 참 뒤인 4월에 이르러 꽃을 피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땅에 상기도 평화가 오지 않음에 대한 부처님의 탄식이 아닐까? ‘서정주’ 시인은 ‘선운사 동구’로 이를 노래하였다,


“선운산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되어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여기 와서 안 사실이지만 선운사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는데 그것은 ‘상사화(相思花)’라 불리는 꽃이다. 상사화는 석산(石蒜)이라고도 하는데 ‘돌마늘’이라는 뜻이고, ‘개난초’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상사화는 중국이 원산지로 잎은 6∼7월에 마르며, 꽃은 붉은빛이 강한 연한 자주색으로 잎이 마르고 난 후인 8월에 개화한다. 그렇게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하여 ‘상사화’라 불린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선운사 인근에 살고 계신 어느 시인은, “내가 어렸을 때 상사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상사화가 예전부터 집단을 이루었더라면 ‘서정주’ 시인이 동백꽃만 시로 읊었을까 하는 생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자생 역사는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상사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기록 등을 볼 때 동백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함을 느낀다. 우선 이름에서 느끼게 되는 애틋한 감상부터 그렇다.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에 따른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꽃의 색깔도 동백꽃도 유사하다 한다. 동백꽃이 ‘빨갛게 멍이 든 것’과 같은 검붉은 색깔인데 ‘상사화’도 ‘자주 빛 도는 붉은 색’이라 하며 특히 핏빛으로 묘사되는 것은 영락없는 동백꽃 빛깔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이 꽃이 어느 날부터 선운사 주변에 자리를 잡고는 이렇게 꽃을 피우고 지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동백꽃으로 상징한 민중들의 삶에 상기도 평화가 없음에 대한 부처님의 또 다른 탄식이 아닌가? 그렇듯 왜 세상의 평화는 이토록 더딘가! 선운사가 가진 신비는 하릴없는 나그네에게 무거운 감상을 지운다. 어디선가 부처님 말씀이 들리는 것 같다. “죄 많은 중생(衆生)아 욕심을 버려라. 그래야 평화를 구할 수 있다.” 오랜 열망 뒤끝에 선운사를 찾은 나그네라 이것저것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참 많다. (♣200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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