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금산사(金山寺) 탐방기

후삼국의 영웅 견훤(甄萱)의 회한을 접하다.

by 장제모

여름의 초입인 6월 초순이지만 한여름과도 같은 후덥지근한 게 여행하기에는 영 마땅치 않은 기온이다. 과거, 그러니까 2~30년 전쯤에도 초여름 즈음의 기후가 지금 같은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문 현상이었고 그런 기후가 나타날 때는 기상이변으로 받아들였다. 즉 요즘과 같이 봄, 여름 또는 여름과 가을 구분이 어려울 정도가 아닌, 사계절이 뚜렷한 것이 과거의 우리나라 날씨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계절이 불분명해지기 시작했고 겨울에도 꽃이 피는 등 ‘이상 난동’ 현상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공연히 날씨 탓을 해 본다.


여행의 목적지인 금산사(金山寺)는 경관이 수려한 모악산(母岳山)에 그 둥지를 트고 있다. 한반도의 골간인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으면서 반도의 중간 지점에서 서쪽으로 용틀임을 하니 소백산맥이고 그 흐름은 얼마를 가다가 다시 새 줄기를 트니 곧 노령산맥이다. 모악산은 이 산맥의 한 주봉으로 산세도 그렇고 경관이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산은 영험(靈驗)을 가진 산으로 또한 유명하다. 금산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불교 사찰(암자를 포함한)들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으며, 증산교(甑山敎)도 이곳에 있는 대원사(大院寺)에서 발원하였고 그 본부가 여기에 있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유사 종교들도 많은데 오래전 세상에 충격을 준, 증산교를 뿌리로 하는 용화교(龍華敎)도 이곳을 거점으로 하였다. 그리고 북한 인민의 신(神)과도 같은 김일성(金日成)의 성씨인 전주 김씨 시조(始祖) 김태서(金台瑞)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은 모악산의 영험과 관련한 화제 감이다.

금산사의 행정상 주소는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금산면(金山面) 금산리(金山里) 이고 사찰이 있는 일대는 ‘모악산도립공원’ 구역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백제 법왕 원년(서기 599년)에 창건되었으나 그 규모는 미미하던 것을 통일 신라 시대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과 시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재건하였는데 모든 건축물과 시설이 파괴 이전의 모습을 갖춘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조선 고종 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근대(1986년)에 이르러 화재로 다시 전소되었는데 1994년에 지금의 모습과 같이 복원되었으며, 다른 건축물들도 이 무렵에 재건 또는 보수된 것이 많다고 한다. 요약하면, 금산사의 주요 건축물은 상당수가 처음 것이 아니고 특히 대적광전을 비롯한 몇몇 건축물은 현대에 다시 지었거나 보수된 것들이다. 이러한 사찰의 현상이 선입견이 되어서인지 불교사찰이 가지는 고유의 냄새(臭)가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이 불교 사찰의 한 상징인 단청(丹靑) 색깔이 너무 선명하여 긴 세월로 그려졌을 역사의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있어 관심을 두고 방문한 나그네에게 기대감을 반감한다.

불교 사찰을 탐방할 때 그곳의 중요한 대상 이를테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 등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는 하지만 연혁(沿革) 등 소개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을 탐방기에 쓰는 것은 대체로 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정보가치도 크지 않는 데다 상투적이라는 점에서 읽는 이들이 흥미를 갖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조물 등 대상이 유명세 여부에도 이야기 감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나 설화가 있는 경우는 스스로 비약이라 생각할 정도로 집착한 글을 쓴다. 금산사는 이런 점에서 좋은 글쓰기 대상이고 그래서 시간을 내어 이렇게 찾아왔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의 분노와 회한의 눈물이 배여 있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 그것이다. 그는 신라 말엽 옛 백제 땅인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서 거사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는데 명분은 국가권력의 부패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어떤 역사는 견훤이 백제 유민(遺民)들을 모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이를 쓴 자의 주관적 이론일 뿐이라 생각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서기 670년경이고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것은 서기 900년 경이니 두 세기(世紀) 반에 가까운 시차(時差)가 있고, 이러한 긴 시간이면 비록 옛 백제 땅에 거주하는 주민이라 하여 백제 유민으로 표현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옛 백제 땅인 전라도 땅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후)백제로 한 것은 이해가 된다. 현 체제(신라 왕정)에 저항하려면 세력을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옛 백제 땅에서 옛 국호를 선택한 것은 상황에 걸맞은 ‘선택과 집중’이고 따라서 탁월한 판단이다. 당시는 국가(신라)의 무능과 부패로 사회가 혼란하여 민중의 정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어 혁명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고, 세력이 필요한 견훤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잘 활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견원은 본래부터 신라영토인 경상도의 상주지방 호족(豪族)이라는 점이다. 요지는, 출신 뿌리가 신라인인 견훤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하여 세력을 모으기 위해 옛 백제 땅에서 봉기하였다고 하여 참여한 세력을 백제 유민 운운하는 것은 설득력이 빈약하다.

역사를 살펴보자.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병합한 시기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기 230년 전의 일이고, 이 시간은 생활이나 풍속 등 문화적 이질성이 많지 않은 양국 국민이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 동화되는데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병합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 예를 들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것과 같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와 같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찾을 수가 없다. 견훤을 추종하여 (후)백제 건국에 참여한 당시 민중들은 세상이 어지럽고 살기가 어려운데 마침 정의로운 지도자가 출현한 데 따른 반사적 행동일 뿐이다. 세상에 정의가 실종되어 불의가 도를 넘을 때 저항이 일게 되는 것은 보편적 인간사이고 당시는 그런 시기였다. 비슷한 시기인 서기 906년에 반도의 중부에서도 후고구려로 불리는, 궁예(弓裔)가 세운 ‘마진’(후에 태봉으로 하였고 결국 고려가 되었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견훤과 궁예가 거사를 한 곳은 각 과거 백제와 고구려 땅이라 하여 200년도 더 지난 시간을 무시하고 추종 세력을 과거 국가의 유민(遺民)이라 보는 이론은 무리다. 앞에서 살폈듯이 견훤은 경상도의 상주 호족 출신이고, 궁예도 경상도의 경주 사람으로 신라 왕족 출신이다.

다시 견훤 이야기를 하자. 그는 아들 신검(神劒)과의 갈등으로 어렵게 건국한 나라를 채 40년(35년 재위)도 넘기지 못하고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에게 바친 후 이곳 금산사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렇듯 그의 역사는 시작 때의 웅지에도 불구하고 남가일몽(南柯一夢)이 되고 말았으니 인간사는 덧없는가 보다. 그러나 그는 비록 꿈을 완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지향한 이상을 달성하고자 노력한 탁월한 지도자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그가 펼친 역사의 길이에 비례하여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역사가 비록 짧다 하여 이루었던 업적들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견훤의 한(恨)이 서린 현장을 거닐던 나그네는 불현듯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의식한다. 그에 대한 연민도 아니고 안타까움도 아니다. 그러나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을 할 수 없다. 다만 슬픈 일을 만날 때 평상심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심정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울분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천년도 더 지난 역사에서 어떤 충격을 받은 것인가? 아! 그렇다. 그것은 분노(憤怒)다. 그가 당시 만났던 분노와는 다를지 몰라도 가슴을 찢게 하는 분노가 일고 있다. 살면서 만났던 부당함에 가슴을 끓였던 화(怒)다. 불의(不義)에 짓눌리면서도 거대한 성벽에 조약돌 하나도 던지지 못하면서 가졌던 분노다. 지금이야 세상은 달라졌으나 정의를 내세우기는 아직은 이르다. 그렇게 분노를 만나야 하는 시간은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노는 아픔만 만들 뿐 어떤 대안도 되지 못한다. 천 년 전 견훤의 분노는 이해하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분노에 함몰되어 자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실제로는 단층으로, 실내에 모신 부처님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부처님을 모신 미륵전(彌勒殿)을 뒤로 하고 보제루(普濟樓)로 향하는 돌계단을 오르는데 나지막이 귀를 울리는 소리, 풍경소리다. 불교사찰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지만 듣는 이에게는 때에 따른 감흥을 일게 하고 하는데 지금의 풍경소리가 그렇다. 자기 감상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무아경에 이르러고 있는데 꿈결에서나 들리듯 한 소리가 들린다.

“지난 시간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소중한 것은 과거가 아니고 현재다. 그리고 더 소중한 것은 미래다.”

과거에도 알고 지금도 알고 있는 그 진리가 혼돈으로 가득하던 가슴을 비워준다. 정신을 가다듬고 잠시나마 마음에 쌓았던 가치 없는 상념들을 저 건너 숲속 위 허공으로 던져버리고는 공손한 자세로 합장을 하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마음을 모은다.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믿기에 다시는 부질없는 상념들로 가슴을 앓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가벼워진 마음으로 금산사를 나선다. (♣200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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