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아름다웠던 추억을 찾아서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으나 마땅한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던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와 그에 어린 추억을 찾아보는 여행길에 마침내 오르게 되었다. 꿈많던 청소년 시절 온 날을 함께 어울려 다니다시피 했던 부산의 고등학교 동창 H가 며느리를 본다는 전갈을 보내왔고, 역시 H와 함께 온 날을 함께하다시피 했던,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는 Y가 부산의 결혼식 가는 길에 부석사에 들를 것을 동의해 주었다. 혼자서 못 떠날 것도 없지만 그동안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또 혼자서 떠나는 것은 아무래도 적적하고 불편도 있을 것 같아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터에 마땅한 기회를 맞은 것이다. 여행하기에 더없는 가을이 익고 있는 데다 먼 날을 회상하는 데 아주 편한 그것도 내 추억 여행과 유관한 동행자가 있는가 하면, 마침 시간을 낼 수 있는 아들 녀석이 운전까지 해 주겠다고 하니 타이밍이 절묘하다.
부석사에 가려는 것은 그간에 써 왔던 사찰 탐방기를 쓰기 위한 목적에 더하여 이곳에 얽힌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추억 여행 목적이다. 1962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이 좌절된 데 따른 절망감을 메우고자 이곳 부석사가 인접한 깊은 산골 마을로 농촌계몽이라는 미명으로 현실도피를 했었다. 그곳은 부석사에서는 제법 떨어진 남대리(南大里)의 북쪽 끝에 있는 ‘진때배기’라는 이름을 가진 산간 마을이다. 그곳은 면(面) 소재지 소천리에서 ‘마구령(매기재)’을 넘어 왕복에 반나절도 더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부석사를 연루시키는 것은 그 추억의 장으로 가던 날 안내하던 면 서기의 안내로 부석사를 들렀고 그래서 남대리를 생각할 때는 당연히 부석사도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추억의 장 남대리는 연고가 없는 곳으로 슬프고 외로웠던 당시의 현실을 피하려고 간 곳으로 숱한 사연들이 점철된 추억의 장이고 그래서 부석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곳이다.
고2 때 맞은 4․19의 거친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419혁명 대열에 참가하였다가 총상을 입고 3개월 여 병원 신세를 졌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꿈(문학가)을 실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의 Y대 국문학과에 합격하였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당시는 5․16 군사 정권 1년 차가 되던 해라 개혁을 위한 소용돌이가 거세게 일고 있었는데 대학 정비도 그 대상이었고 그런 차원에서 대학교 입학 정원을 대폭 축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시 대학입시는 지금까지의 대학별 시험을 폐지하고 현행 수능시험처럼 국가고시로 하고 대학교 정원을 지금까지 수의 절반도 안 되게 줄였다. 결과적으로 입시 경쟁률은 과거에 비할 수 없게 높아졌고 시험 내용도 어려워 절대평가 점수에 미달하는 불합격자 수가 상당하여 각 대학교는 지원자 부족으로 초비상이 될 정도였다. 이런 어려운 시험에 해당 학과의 상위권에 들었고 덕분에 명문으로 불리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입학 등록을 포기해야 해야 했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등록금에다 하숙비까지 드는 서울 유학은커녕 부산에 있는 대학조차도 갈 수 없는 것이 당시 우리 집의 살림 형편이라 애초 대학에 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확고한 약속은 없었으나 형편이 나은 친척들이 도와줄 의향을 보이기에 응시했는데 상위 성적이 되자 모교 선생님은 이왕이면 서울의 명문대학에 가도록 종용했고 평소 동경했던 Y대에 지원했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친척들은 등록금 지원에 난색을 보였고, 서운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부담이 적은 부산에 있는 대학교에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부모님께서 어떻게든 입학금을 마련하겠으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면서 약간의 돈을 마련해 주시면서 등록 준비를 위해 서울로 가기를 재촉하였고, 미련이 있는 나는 못이기는 채 응하고는 상경을 했으나 마감일까지 등록금은 오지 않아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절망감에 빠져 괴로워했고 마침내 절망적인 현실을 피해 어디로든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못나고 비겁한 결심이나 당시로서는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정도로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결심의 배경은 세상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가난이란 굴레 때문에 열등감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럴 만큼, 오랜 시간 가난이라는 굴레에 매여 참 힘들게 살아왔다.
현실도피를 마음먹었지만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친구를 만나고자 친구가 있는 대구로 갔다. 낙방의 충격을 털기 위함인지 당시 그의 집안 형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붕어빵 장사)을 하는 H와 그곳에 함께 있다는 Y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결심을 실행할 계기를 만났다. 그곳의 일간신문(대구매일신문)에 난 르포 기사(1962년 3월 초)를 보고는 그 기사의 현장인 ‘남대리’로 가기로 한 것이다. 5․16 직후인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이른바 ‘농촌계몽’이라는 명분으로 시골을 찾았는데 이런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것으로 현실도피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즉흥적이면서도 맹랑한 결정이다. H와 Y는 이런 결심을 듣고도 침묵으로 응대했다. 그들은 친구의 아픈 마음을 달래 줄 여유가 없는 그들만의 아픈 시간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H와 Y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서로를 알고 난 후부터는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함께 있을 정도로 붙어 다니던 사이로 흉금을 나누던 사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한 친구의 무모한 결정을 두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떠나려는 자와 비슷한 정서가 그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길목에서 대학 낙방이라는 좌절을 맞아 슬픈 시간 중에 있었고 따라서 그들도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신문사의 주선으로 영주의 부석면 면 소재지에서 일박 후 이제 최종 목적지인 남대리로 가던 길에 안내하는 면 서기를 졸라 부석사를 들렸다. 평소 역사 공부에 흥미가 있던 나로서는 역사 공부를 통해 알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석사에 대한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는 그런 여유로운 자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무언가 자신을 죄는 절박함으로 그곳에 가려 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만 현실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로는 굳은 각오가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러서고 싶은 생각과 같이 후회되는 심정이 교차했고 이런 심정이라 무언가를 만나고 그래서 반전을 구하고자 함이 아닌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에 예배당(개신교)에 다닌 적이 있으나 종교가 가진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냥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로 다녔었고, 이곳을 방문하던 당시는 종교에 관심을 두지 않는 무신론자인데다 불교는 무속(巫俗)과 다르지 않다는 어릴 때부터의 선입견이 있던 때다. 그런 자기 종교관에도 불교 사찰을 그것도 일부러 시간을 일부러 내어(남대리 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서 1시간 정도의 거리다) 가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있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니 그때 부석사에 가서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만 그곳의 스님으로부터 절의 내력과 그 유명한 무량수전(無量壽殿) 건물 그리고 뒤편 이 사찰과 관련한 설화의 주체인 부석(浮石)을 본 것만 생각 날 뿐이다.
한편으로는 놀라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심쩍어하는 그곳 주민들을 상대로 나름대로 준비한 계획(한글 교육 등)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했으나 현실적 어려움과 능력의 한계로 별다른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하루가 회의(懷疑)와 싸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하는 생활을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그에 힘입어 옹졸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무모하기조차 했던 세상에 대한 반발을 삭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정(情)을 가지고 대해주는 순박한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지는 등 보람을 갖게 하는 시간도 있었다. 더욱이 이곳의 청순한 소녀와의 만남은 그간의 시름을 덜게 했는가 하면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이곳을 잊지 못할 추억의 장이 되게 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들의 실종에 상심하셨던 아버지께서 찾아오셨고, 군 입영도 해야 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마음으로 가까워지던 마을을 떠나면서 첫사랑이던 소녀와도 기약없는 이별을 하였다.
죽령을 힘들게 넘어 온 자동차는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를 지나 조선조의 유명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닿았고 점심도 먹을 겸 쉬어가기로 했다. 시간은 이미 오후에 접어들었다. 가을이 되면서 바빠진 해가 오후가 되니 그 빠른 행진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귀에 익은 지명(地名)인 단산면(丹山面)을 지나는가 하더니 벌써 부석면임을 알리는 안내표지가 보인다. 당시로는 제법 먼 거리로 기억되는데 이렇듯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시보다 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이리라. 그 옛날, 영주에서 기차를 내려 홀로 ‘부석’ 행 버스를 타고 이곳을 지나면서 이제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후에 내게 닥칠 운명에 대하여 몹시 마음을 썼던 것이 기억난다. 비록 감성적 결심이기는 하지만 이미 한 결정이고 또한 명분을 둘 수 있는 결정이기에 애써 침착하려 했으나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고, 어쩌면 이제 이 길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어 눈물이 났었다. 그런 한편, 자신의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은 가난 때문이고 그것은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가 하면 친척들에게 서운함을 넘어 원망조차 하는 못난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자동차는 어느덧 부석면 관내에 접어들었고 드디어 면 소재지인 소천리가 보이는가 하더니 곧 부석사 방향을 알리는 표지가 보여 반사적으로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대리로 가자면 넘어야 할 고개, ‘매기재’(행정지명은 마구령)가 있는 방향이다. 아! 그런데 그 ‘매기재’ 정상(頂上)이 고개(嶺)임을 알려주는 ‘요(凹)’ 자 형상이 뚜렷이 보인다. 그리고 산 전체의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때의 모습이다. 산의 형상도 색조(色調)도 그때 그 모습이다. 40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이 없는 것은 이곳 지형 환경상 인간의 간섭이 적었을 수도 있지만 그리움이 너무 짙어 옛 모습대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재(嶺)) 너머 남대리, 남한강의 최상류인 남대천이 온 계절을 풍요하게 흐르고 앞뒤 산에는 약초랑 온갖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사람들을 바쁘게 하는 곳,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이웃한 나의 추억의 장소 ‘진때배기’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인생의 패배자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준 고맙고 정다운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실까? 아마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겠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움으로 어느덧 눈가가 촉촉해짐을 느낀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방문을 했던 Y는 다 이해한다는 듯 시선을 맞춘다. 추억의 장 남대리는 자동차로 가기에는 길이 험하고(당시는 불가능했다) 또 계획이 시간이 되지 않아 처음부터 갈 계획은 세우지 않았으나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지나게 되어 섭섭함을 넘어 안타깝기조차 했다.
부석사 입구는 주차장을 포함한 부대시설 공사로 분주하다. 아마 더욱 많아질 관광객을 기대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는가 보다. 공사장 위편의 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찰로 가는 길을 걷는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아니면 9월 하순인 지금이 아직 단풍철로서는 일러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관광객은 우리를 포함해도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 길 가장자리에는 관광객 수보다 더 많은 행상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약초, 산채(山菜) 등을 상품으로 하여 길 양쪽 가장자리에 일렬로 자리를 펴고는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댄다. 헤어져 오래된 이웃을 만나듯 정겨움을 가지고 행상들 곁으로 가 그들이 팔고 있는 상품들을 살피다 문득 옛날 이곳에서 맛있게 먹었던 홍옥(紅玉, 사과 품종)이 생각되어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그것을 찾았다. 당시 경험했던 홍옥은 특유한 향과 맛으로 사과하면 홍옥이 연상 될 정도였고, 그것을 접하면 이곳이 생각이 날 정도로 유난한 기억을 가진 과일이다. 한 입 깨물면 순식간에 다가오는, 간지럼을 타듯 상큼한 신맛, 그리고 다정한 단맛과 함께 입안 가득히 퍼지는 오묘한 향기! 정말 이보다 더한 맛과 향기를 가진 과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여러 행상을 접한 끝에 다행히 나는 홍옥을 구했고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손수건으로 사과 표면을 대충 닦은 뒤 한입 가득히 깨문다. 싫지 않을 정도의 신맛과 함께 특유의 향기가 입 안을 채우는 게 옛 맛 그대로이다.
홍옥 사과 맛에 정신을 뺏긴 사이 어느덧 부석사 어귀에 이르렀다. 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천년 세월을 견뎌온 연륜을 자랑하려는 뱀 허물 같은 무늬의 돌이끼를 고승(高僧)의 청빈(淸貧)과 경륜의 상징인 누더기 승복처럼 걸치고는 우리를 맞는다. 당간지주는 사찰 어귀나 입구에 사찰이 있음을 표시하는 만(卍)자 깃발을 다는 석주(石柱)로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앞서 소수서원에서 본 옛 숙수사(宿水寺) 터에 보았던 것과 유사해 비슷한 시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곳의 당간지주는 그러나 앞서 보았던 소수서원에서의 그것과 같은 감흥은 들지 않는다. 있을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의 그것은 당시 그곳은 사찰(寺刹) 경내였지만 지금은 그곳이 불교와는 이념적 차별을 가진 유교(儒敎) 사당 관내여서다. 비록 출중해도 상황이 평범하면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나 평범한 사물도 그것이 있게 된 상황이 달라지면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의 사유(思惟) 때문이리라.
부석사의 행정지명 주소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浮石面 北地里)이고 사찰이 위치한 산의 이름은 봉황산(鳳凰山)으로 태백산과 연산을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에 속한 산이다. 부석사를 소백산과 연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찰이 있는 곳이 명산 소백산과 가까운 곳이라 있게 된 오해일 것이다. 이 사찰은 서기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수사찰(首寺刹)이라고 하며, 부석사(浮石寺)라는 명칭은 이 사찰을 창건하고 화엄종을 연 의상조사를 사모하던 당(唐)나라 ‘선묘(善妙)’ 낭자와의 사랑의 설화에서 나오는 부석(浮石)으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선묘’는 ‘의상조사’를 사모하였으나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용(龍이) 되어 그가 오로지 불사(佛事)에 전념하도록 하는 한편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조국인 신라로 돌아가도록 도왔다. ‘의상 조사’께서는 이곳에 이르러 사찰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불량한 무리가 방해하자 절 뒤에 있던 큰 돌덩이를 하늘에 띄워 이들을 물리친 후 다시 제 자리에 앉게 하였는데 그 돌이 무량수전 뒤편에 누워있는 돌, 곧 부석(浮石)이라 한다. 그리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 절의 수호신이 되고자 석룡(石龍)이 되어 본존 마당에 누워 그 머리를 무량수전 본존불 아래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마당의 석등에 이르렀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석룡의 상징으로 추정되는 유물 일부분을 발굴함으로 전설과 관련한 신비감을 더해 준다. 그렇듯 유서 깊은 유적에서는 한결같이 존재하는 전설이나 설화가 있고 그것은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저항 없는 신비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민족의 문화인가 보다.
아직도 드문드문 사과를 단 나무들이 임무를 마친 후의 안락감으로 나태한 모습으로 서 있는 과수원을 양옆으로 끼고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니 드디어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 현판을 단 일주문(一柱門)이 우뚝하게 서서 우리를 맞는다. 문의 위치가 경사로 인해 우리가 선 곳보다 위쪽에 있기도 하지만 느낌으로 다가오는 높이는 실제 높이보다 더욱 높게 보이는 것은 이 사찰이 가지고 있는 위엄 때문인가? 높은 문(門)이 주는 위압 때문만은 아닌 체 경건한 마음을 하고 문안으로 들어서는데 문 안쪽 양옆에서 사천왕이 야구공만큼 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경내에 들어섰는데도 여전히 가파른 경사길이다. 그러고 보니 매표소 이전부터 완만하지만 계속하여 경사길이었고 그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계단을 만나면서부터다. 계단을 이루고 있는 우람한 성곽은 이 사찰의 역사가 생생하게 숨 쉬고 있는 실체다. 숱한 세월을 이어온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무리 진 돌이끼, 그리고 오를 데가 있으면 어김없이 덤벼드는 담쟁이가 그들의 생존역사를 자랑하듯 요란하게 그림을 그려놓은 석단(石壇)이다. 부석사는 산의 능선에 터를 마련함으로 본전에 도달하기 위한 방향이 경사인데 따른 길을 만들기 위해 석단을 쌓았는데 그 수가 열 개가 넘는다. 석단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른데 유심히 살펴보니 석단을 오르는 계단이 높으면 그 위의 평지의 너비가 넓고 반대로 계단이 낮으면 그 위 평지의 너비도 좁다. 이와 같은 석단의 높이와 그 위 평지너비의 비율적 배열은 많은 계단을 오름에도 숨 가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참으로 절묘한 배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구조는 지형의 특성에 따른 것이라 보이지만 미리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게 하려는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듯 석단의 축조는 애초부터 예사롭지 않은 설계에 의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또 그 위의 평지를 걷는다. 부석사를 관찰할 때 이야기 주제(主題)를 본존인 무량수전에 앞서 이 석단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도 있을 만큼 구조와 축조 방법의 건축적 가치에 더하여 인간 친화적인 것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석단의 절묘한 구성으로 연속된 경사길 임에도 별로 힘들지 않아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다. 수개월 전 낙상(落傷)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고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Y도 약간은 힘들어하면서도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을 보면 이 석단에 대한 세간(世間)의 평가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높고 낮은 석단의 계단을 오르고 그 위의 길고 짧은 평지를 걷고 하기를 반복한 끝에 부석사의 불이문(不二門)인 안양문(安養門) 마루를 머리에 이고 터널을 빠져나오듯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이 사찰의 본존이자 석단의 정점(頂點) 마당인 이 사찰 본전(本殿)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뜰이다. 느낌으로는 이곳이 산 중턱 정도로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저 아래 마을이 아득히 보이고 다시 앞쪽을 바라보니 무량수전 오른쪽의 뒤쪽 산 위에 파란 하늘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것을 보면 이곳이 거의 산 정상(頂上)에 가까운 곳임을 알게 한다. 대개의 불교 사찰은 산속 깊은 곳에 은거(隱居)하듯 자리를 잡아 경내에 들어서면 사방이 온통 산과 숲에 막혀 속세와 별리(別離)되어 적막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곳은 본전인 무량수전의 뒤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이 열려 있어 산 아래가 훤히 보여 사찰의 색다른 면을 느끼게 한다.
1916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무량수전은 고려 초기인 1016년(현종 7년)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중창(重創)하였으나 1368년(공민왕 7년) 외적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을 1376년(우왕 2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에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로 받쳐주고 있는, 유명세를 가진 사찰의 대웅전으로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아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이란 한식(韓式) 가옥의 지붕 구조로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로 충청도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도 같은 양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불전은 앞서 언급한 묵서명에 1376년에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수법이나 세부 양식이 묵서명 연대의 건물로는 볼 수 없고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祖師堂)이 1377년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나왔고, 이 조사당과 비교할 때 이 건물은 100년에서 150년 정도 앞섰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량수전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본존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건물의 측면인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계신다. 보통 사찰의 대웅전은 부처님이 중앙에 정좌하고 남향인 본전 문을 열면 방문객을 마주하는데 여기는 다른 모습이다. 그 연유를, 부처님과 마주한 동쪽 벽에 신도들의 불공 접수를 위해 자리하고 있는 여인 불자에게 물었더니 이곳 부처님은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 부처님’이라서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불교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불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다만 다른 사찰의 본전에 안치된 부처님과 앉은 방향이 다르고 그것은 불교의 특정 교리에 의하였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어떤 기록에는 부처님의 앉은 위치는 건물의 형식에 따라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도 있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기록에서는 부처님께서 앉은 위치를 인간적 관점에서 이렇다 저렇다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도 하니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어렵다. 무량수전의 부처님께서 본존의 측면인 서쪽에 정좌하시고는 동쪽을 바라보는 진정한 사연은 숙제로 두어야겠다.
여인 불자가 말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의미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서방정토란 아마타불의 정토를 말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도 하며, ‘아미타경’에 "여기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를 지나서 하나의 세계가 있으니 이름을 ‘극락’이라 한다." 한 데서 나온 말로 곧 극락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그곳은 ‘부처와 중생의 동거’의 뜻으로 동거토(同居土)라고도 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대승 불교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로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音譯)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意譯)하였다고 설명하는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한 것은 곧 아미타불을 모신 곳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사찰의 중요 유적으로는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뜰의 석등(石燈, 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고려 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과 그 벽의 벽화(국보 제46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등 국보급 보물에다 고려각판(高麗刻板, 보물제735호) 그리고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불사리탑 등 지방 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문화재와 사찰 건립 당시인 신라 때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앞에서 찬사를 보낸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부석사를 말할 때 우선 연상되는 것은 절 이름인 부석(浮石)에 관한 전설보다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이라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럴 만큼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그러나 그 상징물은 소문이 다소 무색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데다 구조도 단출하다. 그런데도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목조 건축물로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하여 건축물의 고유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렇듯이, 이 불전은 세인의 평범한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품위와 아름다움을 갖추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사색조차 가지게 하는 오묘함을 가진 건축물이다.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오목조목한 각종 구조물이 제각각 정교함을 가지고 정연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있어야 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므로 보여주는 정돈 감이 그런 것들이다. 우선 외양(外樣)이 범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날렵한 팔작지붕은 가벼움의 상징으로 세상사의 중압(重壓)을 거부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생각하게 하고 그 위에 얹힌, 조신(操身)한 여인의 단정한 주름치마처럼 정연한 굴곡을 가진 까만 기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제된 삶을 생각하게 함으로 이 건물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긴 세월을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찬사의 대상으로 부족하지 않은 배흘림기둥들은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도록 하는 중책을 맡고도 피로한 기색 없이 의연한 자세를 보임으로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신뢰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붕 무게를 감당하기보다는 오히려 날아오르는 지붕을 땅에다 붙잡아두듯 어디에도 무게로 인한 피로감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도 느끼게 하지 않는, 처마 네 귀를 받들고 있는 팔각 활주는 중압과 속박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자유의 상징이다.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고 구성이다.
남향인 정면은 자잘한 정(井)자살 분합문이 기둥들을 짝꿍 삼아 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치밀한 살들의 구성이 속인들의 범접을 경계하는 삼엄(森嚴)함이 보는 이를 경건케 한다. 정자살문들은 모두 16쪽(2+4+4+4+2)으로 구성되었는데 양쪽 가장자리의 각 두 짝의 문은 그 안쪽의 문의 너비보다 넓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문의 크기를 용도와 기능에 따라 차별을 둔 것으로 보인다. 안쪽의 각각 4쪽으로 구성된 각 세 곳의 가운데 두 쪽이 출입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앞에 각각 마당과 높이를 가진 댓돌이 있고 그곳을 오르는 계단을 둔 것이 이를 알려준다. 그리고 출입문의 양쪽 출입 기능을 하지 않는 문은 출입문 쪽보다는 넓은데 이러한 구성은 출입 용도와 채광 및 환기 용도를 나눈 과학적 구성으로 이해된다.
본전 감상을 끝내고 뒤뜰의 부석(浮石)을 본다. 이 사찰 창건 설화의 주인공인 부석(浮石)은 그냥 길게 누워있는 체 투박한 전형적인 바위 모습일 뿐이라 낭만적 설화의 여주인공인 ‘선묘(善妙)’ 낭자와 연관하여 생각하기가 어색하다. 다만 이 돌을 받치고 있는 부분이 공중에 떴다고 착각할만한 정도로 가늘고 약한 것이 인상적일 뿐이다. 다시 본전 앞마당으로 나와 석룡(石龍)의 꼬리가 묻혔다는 곳에 선 고색창연한 석등(石燈)과 나란히 서서 소백산 방향으로 시선을 둔다. 멀리 ‘도솔봉’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에 한참 전에 넘어온 죽령이 옅은 구름에 쌓여 아스라이 보인다. 죽령 오른쪽의 봉우리들은 구름에 목이 감겨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이고, 그 구름 사이에 숨은 태양이 구름 사이사이로 주홍빛 광선을 레이저 빔처럼 쏘아대고 있다. 참으로 장관이다. 바야흐로 소백의 영봉(靈峰)들에다 단풍 불을 점화(點火)하는가 보다! 온통 주변 하늘이 붉게 타고 그 빛살은 여기까지 이르러 무량수전의 정(井)자살문의 창호지를 발갛게 물을 들이고 있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분주한 시간이다. 이제 또 한 장의 역사가 넘겨지게 되고, 살문 창호지 안쪽에 계신 부처님께서도 또 하루의 역사를 쌓으시리라.
불전 쪽을 향해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드린 후 뜰 앞으로 걸어 나간다. 본전 마당 서쪽 석단 가까이에 있는 감나무 밑에는 자기 몸통만큼이나 큰 감(柑)을 안고 있는, 갈색 바탕에 가로줄이 선명한 다람쥐를 두고 젊은 엄마와 아기가 눈으로 감탄을 발하면서 바야흐로 감정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환호하는 아기, 그 아기의 표정에 환한 기쁨으로 대답하고 있는 엄마, 그리고 두 사람이 온갖 관심을 두고 있는데도 겁도 없이 감을 싸안고 놓지 않는 당돌한 다람쥐, 자연 속에서 인간과 동물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평화를 상징하는 포스터를 그린다면 이런 광경은 어떨까?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 앞의 이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 나는 잠시 평화(平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평화란 무엇인가?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런 평화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평화와 연관한 물음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의 구원(救援) 곧 인간이 삶에서 맞게 되는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갖게 하고 그로서 평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를 앞세우는 인간 중에는 영화(榮華)와 복락(福樂)을 자기 구원의 목적으로 삼는 수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들의 기도는 이를 구하고자 자기들의 신을 찾는 게 보편으로 보이는 게 그 증거다. 건강하고 부유하고 그래서 행복한 삶이 개인적인 구원일 수 있으나 그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면 그것은 종교가 지향하는 구원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을 두고 논쟁을 원치 않는다. 다만 종교의 지향은 구원(救援)의 제시로 세상의 평화를 구하고자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 집단의 모습으로는 그런 기대가 어려운 것을 숨길 수 없다. 현실 종교로 과연 구원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는 했는데 지금은 실종되었는가? ‘니체’가 결론했듯 존재는 했는데 죽어버린 것인가? 죽었다면 스스로 죽은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였는가?
온 힘을 다하여 빛을 뿌리느라 기진한 해는 어느덧 소백의 영봉들 속으로 숨어버렸고 빛을 잃어버린 구름은 자기 팀이 패배한 후 자리를 뜨는 관중들처럼 무질서한 행렬을 하고 흩어지고 있다. 어둠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을 오후의 스산한 바람이 마음이 슬픈 나무들을 흔들고는 ‘사르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이미 말라 숨쉬기를 포기한 나뭇잎들은 무질서한 흩날림으로 소리 없이 땅으로 떨어진다. 죽음의 찬미인가? 생(生)을 마감하는 상징인 낙엽을 보니 생각은 더욱 깊어만 간다. ‘뎅그렁’! 그 순간 귀를 울리는 소리 아! 풍경, 풍경소리다. 꿈많은 청소년 시절 즐겨 불렀던 ‘성불사의 밤’ 노랫말에서 마음에 둔 적이 있는 그 풍경소리다! 사람의 심금을 울릴만한 음색도 아니고 또한 긴 여운을 가지지도 않은 단순한 금속성 소리일 뿐인 풍경소리는 그러나 마음에 동요를 일게 한다. 무슨 까닭인가? 어느새 체중이 느껴지지 않는 무중력(無重力) 상태에 자신이 있음을 느낀다. 무아(無我)의 경지가 이런 것인가?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가엾은 중생(衆生)아! 생각들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번뇌에서 벗어나라.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모든 것은 생멸변전(生滅變轉)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으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라.”
“.....................,”
‘댕그렁’, 꿈결과 같이 다시 풍경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지금이 현실인지 조금 전이 현실인지,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분명하지 않은 자세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사찰에서 내려오는 길에 행상 아낙네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혹시 추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시간을 함께했던 당시의 남대리 주민들의 행적과 특히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이 아름답게 보이게 한 풋사랑의 여인에 관한 소식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는 아낙네가 여럿 있었지만 재 넘어 남대리에 관한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네들은 오로지 장사 생각뿐인지 애당초 나그네의 애타는 심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말을 붙인 대가로 사과 몇 알과 산채(山菜) 조금을 사고는 차에 올랐다. 이제 부석면 면 소재지인 소천리를 돌아볼 차례다. 올 때 우회도로로 왔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고 이곳에 온 이상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다. 장날이 되면 더덕을 비롯한 산채와 약초 등 남대리 특산품을 가져다 팔고는 쌀이나 소금 그리고 담배와 같은 생필품을 장만하는 주민들을 따라다니다 돌아갈 무렵 막걸리 한잔에 장국밥을 맛있게 먹던 곳,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몇 날을 묵은 편지를 찾아 읽고는 온갖 감회에 젖던 곳 소천리! 그곳은 또 다른 추억의 장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다. 다시 찾은 소천리는 가슴에 그리고 있던 그 소천리가 아니다. 어느 곳에서도 추억의 흔적을 볼 수가 없다. 면사무소는 있으나 옛날의 모습이 아니고 더욱이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되어 자동차가 오가는 그 담벼락 길은 옛날과 같이 장사꾼이 각종 상품을 펼 환경이 아니다. 맛있게 먹던 구수한 장국밥집도 보이지 않고 태양에 그을린 검은 피부의 정다운 산골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슈퍼마켓이 있고 정육점이 있고 노래방이 있으며 외지인에게는 무감각한 사람들만 오가는, 여느 도시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짐을 풀고 막걸리라도 마시며 옛날을 맛보려 했던 기대가 일순에 사라진다. 아쉽다 못해 슬프기도 하다. 마땅한 쉴 곳도 보이지 않지만 쉬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일행들도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어서 이곳을 떠나자는 눈빛을 보내온다. 40년 만의 역사적(?) 방문은 그렇게 끝을 내고 현실이 기다리는 부산으로 가는 길에 자동차를 올린다. 날은 이미 저물어 자동차는 불을 밝히고는 갈 길을 재촉한다.(♠2001.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