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개와 은혜를 이야기하다 -
치악산(雉岳山)은 가보고 싶은 산이었다. 이 산이 보고 싶었던 것은 멀리서 그 산을 보는 기회가 자주 있어서다. 여름휴가 등 강원도 방면으로 여행을 갈 때 영동고속도로의 원주 근처에 이르면 웅장한 자태로 맞아주는 산이 치악산이다. 이 산이 멀리서도 잘 보이는 것은 주변에 버금 할 만한 다른 높은 산이 없어서인데 백두대간의 다른 명산들과는 차별되는 풍경이다. 설악산, 오대산 등은 연봉(連峰)을 이루고 있어 어느 산이 어느 산 인지 쉽게 식별되지 않고 또 이렇게 산 전체를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치악산에 대하여 나름의 동경을 가졌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아마 중학교 때로 생각이 된다. 시조(時調) 시인으로서 우리 가곡 중에 명곡으로 잘 알려진 ‘가고파’의 작사가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의 우리나라의 명산(名山)을 주제로 한 시조집에서 치악산을 접한 것이 그것이다. 선생께서는 치악산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지팡이 끄을면서 치악산으로
궁예의 힘찬 모습.......(뒷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노래로 볼 때 치악산은 후고구려, 즉 후에 왕건에 의해 고려(高麗)로 개명된 태봉(泰封)을 건국한 당 시대의 풍운아 궁예(弓裔)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어릴 때 역사와 지리 등 사회 과목에 흥미가 있어 역사 인물 탐구를 열심히 했고 더불어 지리 과목도 이에 못지않았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 역사 인물을 많이 알고 있었고 역사를 바꾼 풍운아와 같은 인물은 특별히 관심을 두고 탐닉하였는데 후삼국 시대의 견훤(甄萱)과 궁예, 각 고려와 조선을 건국한 왕건(王建), 이성계(李成桂)가 그런 인물들이다.
치악산이 위치한 곳은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그 중심에 가까운 곳으로, 이곳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경계 지점이 되어 세 나라가 영토 다툼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고, 후삼국 시대에는 후고구려(태봉)와 신라 간에도 긴장이 조성되던 곳이다. 궁예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융성했던 고구려를 복원하고자 하는 야망을 행동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치악산은 또 다른 정치적 풍운아와 연관도 가지고 있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후계 문제로 골치를 앓게 한 장본인인 이방원(李芳遠)이 왕이 되기 전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한 곳도 이곳 치악산이다. 이방원은 결국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인 태조와 형들의 견제를 극복하고 조선 왕조 제3대 왕(태종)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史實)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치악산은 풍운아 그것도 왕(王)이 된 인물과 연(緣)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산 이름에 악(岳) 자가 들어있는 것은 산세(山勢)가 험한 산을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치악산은 그런 점에서 야성적인 풍운아의 이미지와 맥을 같이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연관들은 치악산을 인상 깊게 하는 요인들이다.
치악산(雉岳山)은 차령산맥(車嶺山脈)에 속하는 준령으로, 주봉은 표고 1,288m의 비로봉(飛盧峰)이고 남쪽의 남대봉(南臺峰, 1,182m)에서 북쪽의 삼봉(三峰,1,072m)에 이르기까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24km에 달한다. 1984년에 국립공원이 되었으며, ‘영원골’ 등 많은 계곡, 입석대 등 역사 유적 그리고 구룡폭포와 같은 경관이 수려한 볼거리도 많다. 그런가 하면 구룡사(九龍寺)를 비롯한 고찰들이 있으며, 궁예(弓裔)가 축성했다는한 ‘영원산성’을 비롯하여 ‘해미산 터’ 등 역사 유적과 함께 원성 성남리의 ‘성황림’과 같은 천연기념물도 있다. 특히 이 산에 있는 구룡사와 상원사(上院寺)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꿩의 보은 전설’과 관련된 사찰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치악산의 옛 이름은 적악산(赤嶽山)인데, 뱀에게 먹히려던 꿩을 구해준 나그네가 그 꿩의 보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 따라 꿩 치(雉)자를 넣어 치악산(雉岳山)으로 하였다고도 한다. ‘꿩의 보은 이야기’는 어릴 때 집안의 어른이나 형 또래의 선배들에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로 흥미로움을 통하여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치악산과 관련한 ‘꿩의 보은 이야기’는 구룡사와도 연관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구룡사를 꿩의 보은과 관련한 사찰로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구룡사의 유래에 대하여는 별도의 전설이 있다. 구룡사를 안내하는 책자를 보았더니 이 절을 세우게 된 동기와 원래 이름인 구룡사(九龍寺)가 구룡사(龜龍寺)로 된 다른 이야기가 있다. 지금의 절(구룡사)터가 마음에 든 어느 고승(高僧)이 이곳에 절을 짓고자 하였는데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 연못이 있었고 이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절을 짓기 위해서는 연못을 메워야 하므로 고승은 용과 다툼을 벌였고, 결국 고승이 승리함으로 이 절을 짓고는 이름을 ‘아홉 마리 용’을 상징하는 뜻으로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산(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 등 풍부한 산물(産物)로 세속적 욕심들로 이곳의 사람들은 타락하였고 이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조차 수도에 정진하지 않게 되어, 결국 절이 쇠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안타까워하던 한 스님이 그 연유를 알게 되었는데, 원래부터 이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이러한 인간들의 타락으로 영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므로 그 거북의 위엄을 되찾아 주어야 비로소 절의 부흥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폐허가 된 절을 복구한 후 아홉 ‘구(九)’자를 거북을 의미하는 거북 ‘구(龜)’자로 바꾸어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하였다고 한다.
구룡사로 가는 길은 승용차의 경우 매표소 가까이 갈 수 있으나 버스를 이용할 때는 매표소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합동 주차장에서 자동차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이 자동차 길은 산허리에 길을 낸 외길이라 그 폭이 좁아 절 방향으로 볼 때 길의 오른쪽 켠 그러니까 계곡 쪽에 3-4m 정도 폭의 목재로 된 보조 길을 두어 절을 찾는 사람이나 등산객이 이용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설은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사람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편리를 구한다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인도(人道)의 건너편 그러니까 차도의 왼쪽에는 11월 하순인데도 빨갛게 단풍이 든 나무들이 잎을 떨궈 버린 나무들과 칙칙한 갈색의 이파리들로 황량한 산자락을 치장하고 있다. 칙칙한 회색 공간에 점점이 박힌 빨간색은 절묘한 콘트라스트(contrast)를 이루어 아름다운 색(色)의 조화(調和)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토하게 한다. 가을은 그렇게 봄이나 여름과는 다른 정취로 사람들을 맞는다.
매표소를 지나니 이 절의 이름의 유래가 전설인 거북바위를 만난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거북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전설과 연루된 바위라 하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난다. 이 바위를 지나 호젓한 산길로 들어서니 금강송(金剛松)이라 이름을 가진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면서 맞아준다. 이 나무는 그 웅장한 외관으로 이름이 가진 품위를 드러내듯 수려하면서도 장엄함을 보여준다. 왕조의 상징인 대문(大門)과 왕궁(王宮)을 짓는데 이 나무들이 사용되는 나무라 하니 더욱 돋보인다. 금강송 사이의 한적한 산길을 걷자니 가을이 깊은 산사(山寺)를 찾고 있는 자신의 현재가 분명하게 실감이 된다. 맑고 깨끗한 공기에 은은한 솔 냄새와 구수한 낙엽들의 냄새가 어우르니 그것은 우리 산이 가지는 정감 어린 가을 향취다.
구룡사의 입구인 일주문은 원통문(圓通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그 뜻은 아마 원(圓)의 세계, 즉 무한한 영겁(永劫)의 세계로 통한다는 뜻이 아닐까? 일주문을 지나면서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다시 구룡사의 정문인 사천왕문을 지나니 아파트 오륙 층 정도 높이의 가파른 계단 위에 치악산 구룡사라는 현판을 단 보광루(普光樓)가 보인다. 젊은 사람들조차 가쁜 숨을 내쉬며 오르는 것을 보니 높고 가파른 계단인 게 분명하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보광루의 일층 그러니까 보광루 누각의 마루 밑에 이르니 다시 계단이 있고 그 위로 구룡사 본전인 대웅전이 산봉우리에 걸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련하게 드러난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불이문(不二門)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불교에서 불이문이란 진리(眞理)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문을 통해서 비로소 절의 본전(本殿, 대웅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간다는 상징성을 가진다고 한다. 부처(Buddha)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生)과 사(死),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근원은 모두 하나이고, 이와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解脫)할 수 있으므로 또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안내서를 보니, ‘보광루’는 앞면이 5칸이고 옆면은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고, 기단(基壇)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누각(樓閣) 형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누각 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 공간을 향해 벽체가 없이 개방시켰으나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하였고, 정면의 각 칸 사이에는 2짝 판문을 달았다. 누(樓)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이 마루에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러한 설명은 건축 문외한(門外漢)인데다 미술 감각조차 부족한 나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하고 다만 이는 불교사찰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구나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은 이 마루에 멍석이 깔렸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멍석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용도고 얼마나 큰 것인가? 보광루는 대웅전을 마주하고 긴 회랑(回廊)으로 되어 있는데 그 폭이 대충 십여 미터에다 길이는 족히 사오십 미터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멍석이란 새끼와 짚으로 엮은 깔 자리를 말하는데 그것은 놀이나 행사 등을 하기 위한 공간 기능을 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친근감을 가진 기물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 마루 전체에 깔렸다니 과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광루 누각의 이층 마루에 오른다. 누각의 이 마루는 대웅전 방향으로 활짝 열려 있고 반대편 그러니까 동쪽으로는 벽으로 막혀 있는데 그 벽에는 문짝 없는 창이 있어 마주한 산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각 창 앞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다. 긴 거리를 걷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다소 지친 몸을 쉬려고 창 앞의 의자에 앉았다. 숨을 가다듬고는 맞은편의 산을 보니 마치 높은 빌딩의 창가에서 다른 빌딩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누각과 맞은편 사이가 깊은 골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구룡사는 가파른 절벽 위에 동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한참을 쉰 뒤 이 절의 본전(本殿)인 대웅전을 살핀다. 대웅전은 불교사찰의 중심 건물로그 곳에는 주불(主佛)이 모셔져 있다. 날렵한 팔작지붕을 인 채 석등 두 개를 앞에 두고 사람 키 높이 정도의 석축 위에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대웅전은 그러나 그 건축물의 상징성을 볼 때 작은 건물이다. 더욱이 앞에 길게 늘어선 보광루에 비교되어 초라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시각(視覺)은 곧 세속적 자세임을 알게 된다. 크고 작은 것은 그냥 외형일 뿐 그것은 가치의 척도가 아니다. 대웅전이 비록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곳에는 이 절의 상징인 주불(主佛)이 모셔져 있으니 말이다! 이 대웅전은 안타깝게도 본래의 건축물이 아니고 화재로 소실되어 현대(2003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소중한 문화재가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실수로 사라져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절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오른쪽에 잘 정돈된 잔디 위에 여러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은 것을 본다. 올 때는 못 본 것은 다른 길로 간 것인가 아니면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갔기 때문인가? 아무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안내판을 보니 이 절과 관련된 고승(高僧)들의 사리(舍利)를 모셨다는 부도(浮屠)들이다. 사리란 불교에서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곧 고명하신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남기는 당신 품격의 상징물로 이해한다. 불교를 창시하신 석가모니 곧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많은 사리를 남기셨다고 하는데 이를 봉안한 사찰은 유명 사찰로 사람들에게 회자 된다. 사리란 곧 사람의 유골(遺骨)의 한 부분으로 그것은 오랜 수행으로 생애를 보낸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라 이해한다. 이러한 사리는, 성자(聖者)라 할 수 있는 수덕(修德) 고승을 화장(火葬)하였을 때 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비록 그러한 스님들이라 하여 항상 수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스러운 불자가 죽으면서 사리를 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만, 그 생전에 부처님의 깨우침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 깊은 수행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함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둔하고 부족하기만 한 세속의 나그네는 그저 경외(敬畏)의 마음뿐이다. (♣201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