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심이 강한 어린이를 위한 우드카빙 안내서
<여름방학 숙제>
운동화 끈 묶는 법 연습해 오기
*못하는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첫째 아이가 5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께서 내주신 기막힌 방학 숙제는 ‘신발 끈 묶는 법 연습해 오기’였습니다. 더 기막힌 건 아이의 말이었어요.
“얼마 전 체육시간에 운동화 끈이 자꾸만 풀려서 결국 선생님께 도와달라고 했어요”
오 마이갓.
생각해 보니 끈을 묶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었어요.
내가 어렸을 적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운동화 끈을 직접 매야만 했어요. 햇볕에 빳빳해진 운동화에 갈지자를 그리며 끼워 넣고 마지막엔 좌우 대칭한 리본까지 고이 매어 현관 앞에 가지런히 두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요.
그 밖에도 이불보에 솜을 손으로 누비는 법,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는 일, 마늘 빻는 일처럼 엄마 어깨너머로 배웠던 생활 기술은 지금 내 살림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또한 호기심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수동식 페달 재봉틀을 몰래 굴려 봤던 경험으로 신혼 이불이나 소파 커버를 손수 지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직접 보고 몸으로 배운 경험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저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죠.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릅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할 줄 알았던 ‘생활 기술‘은 직접 하기보다 타인의 노동으로 대체하고 있고, 우리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할 뿐이죠.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에 예전과 같은 자급하는 삶을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은 익힐 수 있도록 했어야 했어요. 문제집 한 장 더 풀리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의식적으로 손을 훈련하고 힘을 기르는 활동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제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이 되자 자유학기제(소질과 적성을 키우는 체험 활동 중심 교육과정)를 통해 바느질하기, 냄비 받침, 나무 상자 만들기와 같은 실용 공예 수업을 주 1회 2시간 듣게 되었습니다. 이마저도 자유학년제에서 자유학기제로 축소되면서 지난 1학기로 모든 과정이 끝나버렸습니다. 초등학생인 둘째 아이도 방과 후에서 토털 공예라는 수업을 통해 그날그날 작은 소품 만드는 활동을 하고 있으나, 주요 과목 사이에서 곁다리 신세를 면하기 힘듭니다.
초등 수업 과정에 목공 교육이 의무화되어 있고, 별도 목공실에 목공구까지 완비되어 있는 유럽의 학교와 비교하자면 우리는 중국산 kit에 조립과 채색하는 등 단순, 획일화된 체험형 수업에서 머물러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저 또한 몇 년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목공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늘상 해왔던 고민이기도 하고요.
열악한 강사 처우와 제한된 교육 환경에서 변화를 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고민이 많았던 그쯤에 구입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봤습니다.
<EASY WOODCARVING FOR CHILDREN>
저자는 Frank Egholm, 2015년에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몇 안 되는 어린이 목조각 안내서 중 하나입니다.
모험심이 강한 어린이를 위한 Whittling 프로젝트라고 했지만, 목조각이 궁금한 어른이 가볍게 읽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매우 놀라웠던 점은 목조각이 가능한 나이를 6세부터 8세까지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떠올려보면 초등학생 시절 미술시간에 고무 판화나 비누 조각을 할 때 처음 조각칼을 사용했고, 칼은 중학생이 다 돼서야 연필을 깎기 위해 커터 칼을 써봤던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연필을 깎아 쓸 일이 없으니 칼이 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초등학생이어도 젓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있는 것처럼, 나이보다는 각자의 신체 발달을 고려해서 소근육 발달에 문제가 없고 위험한 상황 판단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갓 자른 신선한 생목을 사용합니다. 재료는 구하기 쉬워야 하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서든 조각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실제 마른나무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을 주어야 하는데 고정된 작업대 없이 손에 들고 조각하는 것은 사고 위험이 큽니다.
재료를 구하는 방법은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무단으로 나뭇가지를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정원에서 손질되고 남은 것이나, 크리스마스 이후에 버려진 크리스마스트리에서 구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적절한 칼을 고르는 방법이 나와 있는데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은 감자 필러로 나뭇가지 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연습하기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날 끝이 무딘 나이프나 칼날 일부분을 접착테이프로 감아서 사용하는데 참 괜찮은 방법이네요.
당겨 깎기를 할 때 합판으로 만든 작은 판자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죽을 덮어서 만든 휘팅 보드.
밀어 깎기 동작에서 나무를 고정할 수 있는 간이 카빙 시트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나이프 사용법은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네요.
이 외에도 비교적 쉬운 동물 모양 조각부터, 장난감, 게임 등 50개 이상의 활동 예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난이도를 1~3단계로 구분했는데 2~3단계는 아이들이 따라 하기에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Frank Egholm은 휘틀링 기술을 배우기보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와 나이프를 이용해 노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것을 ‘Green hobby’ 라 불렀습니다.
이 책은 목공이나 생태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Green hobby가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요.
이전에 초등학생 몇 명과 우드 카빙을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완성품을 만들어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경직된 생각으로 완성해 내는 것에만 목적을 두었습니다. 몇 번의 칼질과 사포로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따라 할 수 있도록 지도했고 잘 만들어진 샘플에 맞춰 아이들은 따라 하기 급급했습니다. 그러자 남들보다 뒤처진다, 샘플과 모양이 다르다며 제 도움을 받길 원했어요.
규격화된 나무토막을 주고 완전한 형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이들의 목표와 한계를 미리 정해둔 거나 다름없었던 거죠. 반제품을 따라 조립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하지만 나뭇가지처럼 가공되지 않은 자연 날것의 재료는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치 못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때 지도자의 역할은 방향을 정해주지 않은 채 아이들이 손으로 충분히 사고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 희망 사항을 적어버렸네요.
아이들이 나뭇가지 하나 깎아 보고, 운동화 끈을 직접 묶어 봤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나아질 것이라 장담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어릴 적 손끝으로 익히는 경험들이 언젠가 세상에 던져질 자신을 지키고 돌볼 수 있는 힘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