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ive Vibes

나는 지금 인디언 썸머를 지나고 있는 중...

by 새벽나무

나는 34년차 직장인이다. 주말이 끝나가는 것이 싫고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인 직장인들과 같지만 그들과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곳에 지원하여 입사시험을 통과해 원하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이 보통의 직장인들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 점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회사가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왔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지금 장기 휴가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병으로 인한 휴직 상태다. 올해 초 건강진단을 하다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급히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조직검사를 통해 ‘육종암’ 이라는 희귀암 판정을 받았다. 나에게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 없는데... 내 능력의 200%를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는데...


예전 나의 삶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동동 거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회사에 다니며 아이를 키우고 대학원엘 다녔다. 휴일엔 클래식 프로그램 출연하여 라디오 녹음을 하고 대학에서 예술경영 강의도 했다. 직업과 관련하여 주 3~4회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았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업그레이드 하기위해 이것저것 배우고 모임에 참석하고 각종 미팅을 하고... 평균 수면시간이 3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젊고 체력이 허락할 때는 그 모든 일정들은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쫒아 다녔다.


그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수면시간을 줄이고 고강도의 새벽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일상 속에 많은 일을 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내 삶의 질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나는 점점 예민하고 까칠한 괴물로 변해갔다. 그래서였을까?

수술을 끝내고 더 힘든 항암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자고, 주사 맞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시간들이 당혹스러웠지만 머릿속을 비울만큼 잠시 동안의 여유도 갖지 못한 생활을 꽤 오래 해온 나에게 그 시간들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그간의 생활 끝에 그런 병이 생겼다는 것은 그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여겨졌다. 휴직기간 동안 나는 내가 살았던 생활방식과 식습관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야만 했다. 여태껏 살아보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매일 아침 명상을 하고 4~5Km정도 산책길을 걷는다. 오전 오후 요가를 하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가벼운 책을 읽으며 때때로 공연, 전시를 보기도 한다. 잠들기 전에 반신욕을 하여 숙면에 도움을 주었다. 저장음식 보다는 싱싱한 제철음식을 그때그때 해먹고 농약으로 키운 채소보다는 유기농이나 집에서 키운 채소들로 식탁을 차렸다.


집과 회사가 지척인데도 퇴근 후 미팅과 약속들 때문에 시간 절약이라는 이유로 자가용을 이용해서 출퇴근했었다. 그러나 6개월여 운전을 하지 않다보니 이제 지하철 두세 정거장은 걸어 다닌다. 걷기를 생활화하니 우리 동네 빵집에서 빵 나오는 시간이 몇 시인지 미장원 문은 언제 여는지도 알게 되었고 평소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몸담았던 회사는 여전히 소중하고 내가 했던 일들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한 발짝 떨어져 생활해보니 세상 밖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 또 다른 세상에는 내가 몰랐던 흥미로운 일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이란 무섭고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병에 걸려 회복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이것들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두 다리로 힘차게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것, 더 늦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어쩌면 지금이 나에겐 인디언 썸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리던 여름의 태양도 9월에 접어드니 가을빛을 내뿜는다. 관성에 따라 일에 몰두하며 보내던 계절과는 다르게 내 주위의 자연과 사물들을 여겨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선물 같은 휴직기간 동안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더욱 몰두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길 바라며 변화하는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오늘도 운동화 끈을 묶으며 산책길에 나선다. 코끝에 서늘한 가을바람 대신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훅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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