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테이션은 안 가도 그만이라는 걸 너무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서른이 넘어 다시 시작한 대학 생활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다. 모든 기억을 안고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 드라마에서만 나올 것 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참 신나는 1학기였다.
학교 측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절대 빠지지 말라"는 오리엔테이션의 엄포도, '인생 1회 차'를 이미 겪어본 만학도에게는 그저 귀여운 협박일 뿐이다. 어차피 중요한 정보는 나중에 다 공지될 것이고, 당장 급한 건 학교 근처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숨을 고르는 일이라는 걸 나는 안다.
고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준비는 짧았다. 개강 한 달 전부터 집을 구하러 다니는 동기들과 달리, 나는 개강 이틀 전 에어비앤비 예약 하나 달랑 들고 헝가리에 도착했다. 무책임함이 아니라, "가서 부딪히면 다 된다"는 직장인 시절의 데이터가 만든 근거 있는 여유였다.
우리 학교는 개강 초에 와인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와인 페스티벌에 가서 신나게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와인 잔을 기울이던 그 시간은, 앞으로 닥쳐올 폭풍 같은 학기를 앞두고 만학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체질에 딱 맞는 여유였다.
하지만 여유로웠던 탐색전이 끝나고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몰아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 불안함에 쫓겨 학부 시절처럼 무작정 잠을 줄이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잠은 사치가 아니라 뇌의 휴식 시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쌓인 방대한 공부량과 유급의 공포는 결국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끌어다 앉혔다.
조금이라도 더 효율을 높여보려 이해와 키워드 중심으로 암기하고, 유튜브에서 암기법을 찾아 앞글자를 따서 노래를 만드는 구차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체면보다 효율을 택하는 사회인의 방식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절대적인 양 자체가 워낙 많다 보니 결국 잠을 줄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시험 기간 내내 이어진 수면 부족의 대가는 혹독했다.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에는 '신체 나이'를 간과해 초점이 풀린 만학도가 서 있었다. 눈은 뻑뻑하다 못해 찢어질 듯 건조해졌고,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방법을 알면서도 불안함 때문에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던,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던 처절한 1학기였다. 이제 이게 장기 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니, 다가올 학기에는 정말 어렵더라도 수면 시간을 확보해 보려 다짐할 뿐이다.
우리 학교 유학생들에게 학기말 해부학 시험은 공포 그 자체다. 엄청난 범위는 물론, 교수 앞에서 직접 설명해야 하는 구술시험(Oral Test) 방식 때문이다. 세 번의 기회 안에 통과하지 못하면 '유급'이라는 알고 싶지도 않은 강을 건너야 한다. 긴장되는 시험장 앞에서 나를 지탱해 준 건 20대 때 겪었던 치열한 경험들이었다.
나는 비록 완벽하게 외우지 못했을지언정, '기세'만은 잃지 않기로 했다. 어떤 토픽이 주어지든 최소한 기본은 말하고 오겠다는 배짱, 모르는 질문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내가 아는 키워드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능력.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K-직장인만이 가진 치트키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해부학 시험을 단 한 번에 통과했다. 한 학기를 문득 돌아보니, 그 살벌한 시험공부를 하는 와중에 살 집을 구하고, 거주증 신청도 끝냈으며, 까다로운 현지 은행 계좌까지 모두 열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업무들을 동시에 쳐내면서 ‘이게 정말 가능한가’ 싶어 아득해지던 순간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의 일이 쏟아져도 기어이 하나씩 해내고야 말았던 응급실에서의 기억과 감각이, 낯선 타국 땅에서도 조용히 발휘된 셈이다. 그 치열했던 시간들이 쌓여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음을 느낀다.
혈관 이름을 모조리 외우느라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은 지난 직장 시절 1mm를 어떻게 자르느냐를 고민했던 시간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간호사로, 또 로봇 전문가로 바쁘게 살았던 나의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쳐도 우선순위를 정해 몸을 움직이는 담대함, 그것은 지금 내 의대 생존을 지탱하는 가장 큰 자산이다.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쌓아온 시간들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한 이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매일이 새롭고 또 막막하다. 하지만 1학기를 무사히 마친 지금,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내 안에 쌓인 시간들이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이제 나는 그 믿음을 품고, 다음 학기의 페이지를 조용히 넘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