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숙 May 11. 2024

<로봇 드림> :무엇이 이 도시의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

주고받는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할 거야

5월 9일 목요일 21시 55분 라이카시네마

공허한 눈으로 게임을 하고, 맥앤치즈를 데우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식사시간을 채워보고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도그의 모습이 마치 이 좁은 원룸의 나 같았다. 도그는 뉴욕에서 198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나 닮을 수가 있다니. 영화 초입부터 도그에 이입해버렸다.

 23시 40분. 집으로 오는 길이 조금은 무서워서 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오직 하나. ‘무엇이 이 도시의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 오로지 이 문장뿐이었다. 잠깐 타코야끼 냄새에 마음을 빼앗겨서 정신을 차렸을 땐 ‘무엇이 이 도시의 타코야끼를 춤추게 하는가?’라고 되뇌고 있었지만.

 100여 분의 시간 끝에서 질문을 품게 된 건 애니메이션의 결말 때문이다. 춤으로 마지막을 밝히는 주인공들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결말을 맞았는데도 춤을 출 수가 있는 거야? 이런 결말에도 춤을 출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뭐지?’

5월 10일 금요일 18시 10분 필름포럼

가실 생각이 도통 없는 전날의 질문을 해결해 보고자 영화관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라이카 시네마와 필름포럼은 티켓 가격이 저렴하다. 두 번 관람하는데 총 18,500원 들었다.

 이번엔 도그가 아닌 로봇의 시선으로 애니메이션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목이 로봇드림(Robot dreams)이라는 걸, 그러니까 로봇의 주체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걸 1회 차 관람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봇의 시선으로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어도 쉽지가 않다. 영화를 여는 도그의 공허한 눈빛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도시의 이방인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같은 리듬을 타고 같은 춤을 추고

도그의 초점 흐린 눈이 로봇의 등장과 함께 반짝반짝 생기를 띤다. 로봇이 아직 로봇이기 전부터, 그러니까 로봇이 부품이자 고철 덩어리일 때부터 말이다. 마시던 음료를 로봇에게 건네는 것으로 두 주인공의 서사가 시작된다. 관계의 시작, 우정의 시작. 도그와 로봇 두 주인공의 달뜸이 스크린 밖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2D 그래픽에, 대사 한 줄 조차 없는 데도 말이다.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같은 리듬을 타고, 같은 춤을 추고, 같은 곳을 걷고 헤엄치는 것. 로봇은 도그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도그는 로봇을 통해 생기를 찾는다. 연인 같기도, 친구 같기도, 자매 같기도 한 도그와 로봇을 보고 있으면 흐뭇하게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이별의 모양

두 주인공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조금 더 길면 좋으련만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몰아친, 그러니까 관객으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은 곧 곧 끝나버린다.

 집에 가려는데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소금물에 부식된 것일 테다. 누운 채로 꼼짝 하나 할 수 없는 로봇을 두고 도그는 집에 온다. 2회 차 감상을 하니 ‘아니이! 하루만 로봇 옆에서 있어줘!! 다음날이 되면 누구라도 오겠지!!! 안 돼!!!! 가지 마!!!!!’하는 마음에 도그가 밉고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도그를 탓할 수는 없다. 불가항력적인 이별,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이별도 있는 법이니까.

 꼼짝없이 누워있는 로봇이 맑은 두 눈으로 해변 입출구를 가리키며 도그에게 얼른 가보라고 눈짓하는 장면이 너무너무 슬프다. 영화 내내 관객을 슬프게 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시종일관 일그러짐 없는 로봇의 맑은 눈과 위를 향하는 입꼬리.


로봇의 꿈과 도그의 꿈

‘6.1. Go get robot!’ 도그는 6월 1일 해변이 다시 개장하는 날만을 기다린다. 로봇은 사정을 알 수 없다. 한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

 계절이 변하는 동안 로봇은 세 번의 꿈을 꾼다. 귀인 아니 귀묘(토끼)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 철창문을 뛰어넘어 룰루랄라 도그에게 가는 꿈, 눈 속에 파묻힌 몸을 일으켜 다시 철창문을 뛰어넘어 도그에게 가는 꿈, 그리고 도그와 함께 본 오즈의 마법사 속 주인공이 되어 탭댄스를 추며 도그에게 가는 꿈.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도그를 찾아가는 꿈들이 모조리 도그를 만나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것처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하다. 귀묘인 줄 알았던 이들은 구멍 난 보트를 수리하기 위해 로봇 다리를 잘라 버리고, 눈 속에 처박힌 도그는 하릴없이 얼어갈 뿐이다. 두 번째 꿈에서 깨기 전, 로봇이 눈 속 얼음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마음이 아리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일렁이는 슬픔이 이렇게 마음 아플 줄이야.

 다시 혼자가 된 일상을 살아가는 도그는 핼러윈 데이에 분장도 하고, 동호회도 나가보지만 친구 사귀기란 쉽지 않다. 집에서 홀로 게임을 하며 맥앤치즈를 데워 먹는 것이 도그의 일상일 뿐이다. 그래도 한 자리에 누워있는 로봇에 비해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해 가는 도그를 볼 때, 너무 쉽게 체념해 버린 것은 아닌지, 너무 혼자서만 잘 사는 게 아닌지 하는 얄미운 마음이 슬쩍 들기도 했지만 아니다. 딱 한 번 연출되는 도그의 꿈이 말해준다. 도그도 로봇을 잊지 못했다고,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만날 수 없는 현실에 할 수 있는 것은 꿈꾸는 것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서로가 꿈에 그리는 얼굴이 되어 간다.

때에 따라 찾아오는 시절 인연

그렇다고 주야장천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뜻밖의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로봇에게는 오리가, 도그에게는 새들이라는 시절 인연이 있다. 시절 인연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잠시 잠깐 머물렀다 가는 인연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마음을 덜 주는 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오리가 아니라면, 새들이 아니라면, 도그도  로봇도 여전히 혼자서 무표정에 무채색의 삶을 살았을 테니까. 잠깐이지만 시절 인연 덕분에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

 시절 인연과의 이별도 탓할 수 없다. 불가항력적 이별. 각자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니까.


드디어 D-day 하지만…

6월 1일이 되자마자 도그는 해변으로 향한다. 하지만 로봇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로봇은 이미 고물상에서 산산분해 나버렸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도그는 해 질 녘까지 모래사장 여기저기 깊은 구덩이를 파헤치며 로봇을 찾다가 해변에서 쫓겨난다. 돌아오는 도그 손에 들린 것은 토끼들이 보트를 수리하고 내던진, 발가락 잘린 로봇의 다리 한쪽뿐.

 절망한 도그는 로봇 다리를 들고 로봇 가게들을 찾아다닌다. 로봇과 같은 종의 로봇 AMICA 2000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살려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같은 종의 로봇 AMICA 2000을 구할 수 없다. 절망한 도그는 Pal Bot이라는 로봇을 새로운 친구로 들인다. 1년의 기다림, 그리고 체념. 로봇의 자리를 Pal Bot으로 채워보려고 한다.

 한편 고물상에서 산산분해된 로봇은 rascal이라는 너구리에게 구조된다. 하나의 고철로 영영 버려질 뻔한 로봇이 너구리를 만나 다시금 살아 있는 로봇으로 태어난다.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말이다. 두 개의 카세트 플레이어가 달린 라디오를 몸통 삼은 새로운 몸.

 도그는 Pal Bot과, 로봇은 너구리와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도그는 Pal Bot과 산책을 하고 해변을 가고(그렇지만 물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로봇은 너구리와 피자를 먹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말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는

영화의 하이라이트.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면서 케첩을 가지러 가던 로봇이 창문 아래로 Pal Bot과 지나가던 도그를 봐버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꿈에 그리던 도그. 손에 든 케첩 유리병은 산산조각 나고 로봇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간다. 도그를 잡기 위해, 도그를 만나기 위해. 둘은 횡단보도에서 재회하고 진한 포옹을 나눈다. 하지만 이것은 로봇의 마지막 꿈일 뿐이다.

 로봇은 도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도그를 만나면 머쓱해질 도그 옆의 Pal Bot과 자기 옆의 너구리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봇이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로봇은 자기 몸통을 내려다본다. 두 개의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다. Robot’s favorite과 Rascal’s favorite, 마치 두 개의 심장 같다. 로봇은 Robot’s favorite을 재생시킨다. 그러자 도그와 로봇이 함께 춤추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로봇은 볼륨을 높인다. 창 아래 도그에게까지 음악이 닿을 수 있도록.

 음악이 들리자 도그의 꼬리가 반응을 한다. 살랑살랑. 그러더니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로봇과 함께 추던 춤. 로봇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했던 시간을 즐겁게 추억하는 것으로 재회를 대신한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새로운 춤을 추는 것으로 재회를 대신한다.

이 도시의 우리를 춤추게 하는 것은

2회 차 관람의 목적, 1회 차 관람 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 ‘무엇이 이 도시의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지 자문한다면, 얼핏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해답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찾은 것 같다. 로봇에게 잠시 머물다 간 새들에게서 말이다. 사실 로봇과 새들이 함께하는 신을 보면서 ‘아, 이거구나.’ 싶었다.

 누운 자리에서 한 발짝도 꼼짝 할 수 없는 로봇에게 찾아온 어미새는 로봇을 안전지대 삼아 둥지를 짓고, 둥지에서는 세 마리의 아기새가 부화한다.

 세 마리의 아기새 중 가장 늦게 부화한 아기새는 손이 가는 아이다. 로봇은 모든 새의 안전지대이지만, 막내 새에게는 특별한 안전지대다. 둘은 특별한 교감을 나눈다. 자다 깨 앙앙 우는 아기새에게 휘파람 자장가를 불어 주기도 하고, 혼자서만 제자리 날갯짓을 하며 날지 못하는 아기새를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으로 날갯짓의 박자를 맞춰주는 로봇은 막내 새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새들과 함께하는 로봇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나 살아 있다고, 나 행복하다고, 꼼짝없이 누워 있지만 주고받는 마음들이 나를 살게 한다고.

 그래, ‘주고받는 마음’. 이것이다. ‘주고받는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한다. 무표정한 얼굴에 표정을 더하는 것, 눈 뜨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주고받는 마음’인 것이다.

 춤추는 도그 옆에는, 춤추는 로봇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면, 그러니까 ‘주고받는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면, 우리는 나에게 마음을 주고 내 마음을 받아주는 이들과 춤출 수 있다. 춤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생크림단팥빵 한 입과 달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