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을 배웅하고 먹는 <신흥떡볶이>
눈물나게 억울할 정도로 푸르렀다. 날씨 말이다. 동생들이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맑아지다니 하늘이 얄밉다. 야속하다. 한 달 전부터 김 씨 가문 세 자매가 모일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늘은 우리를 훼방 놓기로 작정한 것 마냥 동생들이 서울에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시-작!’하고는 비를 뿌렸다. 그것도 하루 종일.
망원동 골목 한복판에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신발이 다 젖은 것은 물론이고, 막내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 그러니까 <키티 50주년 특별전> 굿즈샵에서 야무진 쇼핑을 마치고는 굿즈들을 담아갈 용도로 400원 씩이나 주고 산 키티 종이 가방이 흐물흐물 젖어버린 것이다. 동생들 얼굴에는 엄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다크서클이 내려 앉아 있었다. 급하게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을 때 동생1은 넋이 나가 있었고, 동생2는 내용물을 비운 키티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거꾸로 세워 말렸다. 애써 속상함을 감추면서 말이다. 도통 그칠 생각 없어 보이는 비를 하염없이 내다보며 식당 예약을 한 시간 앞당겼다. 숙제를 하듯 밥을 먹고는 곧바로 집으로 틀어박혔다.
셋으로 꽉 차버린 원룸, 자취방이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순간. 아이스크림으로 급속 충전을 하자 몸에 당분이 돌고 표정들이 살아났다. 조각 케이크를 퍼먹고 에어프라이어에 과자를 돌려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다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씻었다. 따순 물에 몸을 녹이고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까지 말린 동생들은 열한 시도 되지 않아 곯아 떨어졌다. 평소라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긴긴밤을 보냈을 텐데 꼼짝없이 빗속에 갇힌 동생들은 야식을 포기할 정도로 고단했나보다.
옆으로 누워 발밑에서 들려오는 동생1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애틋함이 몽게몽게 가슴에 피는 듯 했다. 동생1은 한 달 전부터 이날을 위한 옷을 사두었고, 일명 망원동 빵지순례 성공을 기원하며 꼭 방문해야 할 빵집 목록을 만들어 두었었다. 하지만 옷은 비에 축축해져버리고 빵지순례는 한 군데도 성공하지 못 했으며 “언니 나 추워”를 입에 달고 하루를 보냈으니, 기대와 다른 하루를 보낸 동생1을 보며 어떤 애잔함이 밀려든 것이다. 하지만 동생1의 낮은 코골이에 맞춰 애잔함과 미안함의 경계를 오가던 것은 동생2의 방귀 소리와 함께 파르르 흩어졌다. ‘그래. 오늘 몸이 개고생하긴 했지만 잘 먹기도 먹었지!’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비바람은 없었다는 듯 날이 말갛게 걷혔다. 아, 야속하고 야속하고 야속한 날씨여! 하지만 별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날씨를 통제할 마법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마법 또한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김 씨 가문 세 자매가 모이는 다음 기회에는 부디 날씨가 좋기를 바라며 동생들을 잘 배웅해주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동네 작은 골목에 위치한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 가게에서 에그타르트를 길빵(길에서 빵먹기)한 후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여느 때보다 진한 아쉬움, 그러니까 딱 하루만 더 붙잡아 좋은 것을 보고 먹으며 놀고 싶은 욕심과 동생들을 따라서 확 전주로 내려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삼키고는 동생들을 배웅했다.
터미널에서 9호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실내 이동을 하다가 발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해, 해를 맞고 싶었다. 집에 가기 전, 아직 진하게 남아 여운이 가시지 않는 아쉬움을 햇볕에 바싹 말리고 싶었다.지하철로 27분이면 집에 도착할 테지만 57분 걸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720번 버스 창가에 앉아 선우 언니와 하나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을 때리는 중이었다. 한강을 가로 지르는 중이었다. 강 위로 부서지는 햇살에 ‘비가 와서 그런가? 오늘 따라 윤슬이 유난히 찬란한 것 같네.’ 넋 놓고 감탄하던 그때 ‘떡.볶.이.’ 세 글자가 콕.콕.콕 뇌리에 박혔다.
떡볶이라니. 이렇게 감상에 젖어있을 때 떡볶이라니. 모든 일엔 모름지기 분위기, 그러니까 무드(mood)와 흐름이란 것이 있는 것인데 나의 식욕 센서는 그런 것은 일절 모른다는 듯 머릿속에 새빨간 떡볶이를 자꾸만 불러 왔다. 동생들과 함께한 1박 2일 동안 탄(수화물) 탄(수화물) 탄(수화물)을 때려 먹었기 때문에(탄탄탄 식단 리뷰 1일차 : 점심 - 팟타이, 태국식 볶음밥, 치킨&고구마튀김, 저녁 - 모듬 곱창, 볶음밥, 곱창 라면, 간식 - 아이스크림, 과자. 2일차 : 아침 - 샌드위치, 말차 케이크, 황치즈 바게트, 황치즈 크림빵, 이성당 찹쌀구운모찌, 간식1 - 에그타르트, 간식 2 - 뺑스위스, 블루베리 레몬 스콘) 남은 하루는 탄수화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거뜬할 정도인데 탄수화물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떡볶이를 불러 오다니, 나의 식욕 센서는 분위기도 모르고 건강 상식 같은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식욕 센서를 탓할 수 없다. ‘그렇다면 떡볶이 말고 뭐가 있지? 지금 이 무드에 맞으면서 건강한 영양 섭취까지 챙길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지?’ 자문해보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분위기도 모르고 건강 상식 같은 것도 모르는 식욕 센서는 나의 원초적 본능이랄까, ‘나 그 잡채’이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모래내 시장 초입에 자리한 아주 낮고 작은 떡볶이 가게에 들렀다. 오래된 허름한 외관 <신흥 떡볶이>. 산책길에 네모난 철판 위를 가득 메운 빨갛고 퉁퉁한 떡들을 볼 때마다 ‘언제 한 번 먹어야 하는데…’하며 점찍어둔 곳이다.
머리가 닿을락말락한 낮은 입구로 들어갔다. ‘떡볶이 1인분 포장 안 되면 어떡하지? 순대도 사야 하려나? 순대까지 사기엔 양이 너무 많은데….’ 하는 걱정1과 ‘떡볶이 1인분 포장은 되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되면 어떡하지? 아니야, 요즘 카드 결제 안 되는 곳이 어딨어? 그치만 4,000원 결제하는데 카드 결제하면 눈치보이려나? 여기 시장이잖아….’하는 걱정 2를 안고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사장님, 혹시(혹시가 포인트다.) 떡볶이 1인분 포장 돼요?”
(가게 안쪽에 계시던 사장님이 푸근한 미소를 띈 채, 그렇지만 시선은 시크하게 떡볶이에 고정한 채)
“당연히 되지요.”
(화색을 띄며)
“떡볶이 1인분 포장해주세요.”
사장님은 움푹 파인 1인분 접시 위에 크린백을 벌려 빨간 떡을 네 번쯤 퍼 담으시고는 비닐만 쏙 빼서 묶고, 검은봉다리에 넣어 주셨다. 크린백에 담아주시는 떡볶이, 이런 포장 얼마만인가!? 검은봉다리를 받아 들고는 카드를 내밀었는데 카드를 받으시는 사장님께서 어째서인지 웃고 계셨다. 왜 웃고 계셨을까? 나와는 주문 이외의 대화는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혹시 떡볶이를 담아주실 때 입맛 다시며 네모난 철판 위에서 퉁퉁 불어가는 떡들을 이리저리 찍어댔던 게 귀여우셨나? (...) 아님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걸까?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시종일관 푸근한 미소로 응대해주신 사장님 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충만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오른 손에 들려 앞뒤로 흔들리는 검은봉다리에 아쉬움은 바싹 말라 뽀송뽀송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봉지를 열어 그릇에 떡볶이를 담았다. 동생들이 머물다 간 자리, 청소할 게 한가득이었지만 제쳐두고 떡볶이 세팅이 먼저다! 자리에 앉아 떡 세 개를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었다. 동생들이 벗어던진 잠옷,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건과 빈 탄산수 페트병, 주방에 쌓인 설거지거리 한 가운데서 녹진하게 매운 소스와 쫀득쫀득한 떡을 밀어 넣으며 저작 운동을 하고 있으니 ‘육퇴(육아퇴근)’라는 말이 떠올랐다. 육퇴라니, 고작 이런 걸로 육퇴를 떠올리다니 스스로가 가소로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35살이 되어도, 40살이 되어도, 50살이 되어도, 80살이 되어도 동생들은 나에게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작고 젖살 퉁퉁한 아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