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 도령이 머물다 간 자리

내 남자친구의 조용한 휴일 루틴

by 쑥자람

살금살금-

침대 위에서 내려와


사뿐사뿐-

까치발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은 부랴부랴 허둥지둥하는 여느 아침과는 달랐다. 나무 늘보가 된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엄마 몰래 과자를 꺼내 먹는 아이처럼 가만가만히 출근 준비를 했다. 쌔근쌔근 침대 위에서 문이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의 달콤한 숙면을 깨우지 않는 것은 일을 마치고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온 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작은 배려다. 6평도 안 되는, 공간 분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공간에서 곤히 자는 그의 달콤한 숙면을 방해할 순 없다.


회사 갈 채비를 마치고 간단하게 문의 점심과 간식을 준비했다. 참외를 깎아 밀폐 용기에 담아두고, 밥솥에 현미쌀을 앉힌 후 슬며시 문 옆에 누웠다. 더웠는지 이불을 걷어 차고는 벌러덩 누워 자고 있는 문의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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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점심 먹어.”

“으으으음”

“밥솥에 현미밥 앉혀 놨어. 냉장고에 달걀 있으니까 달걀은 두 개 이상 후라이 해서 간장계란밥 먹고.”

“으으으음”

“냉장고에 참외도 깎아 놨으니까 간식으로 먹고, 곤약젤리도 있으니까 배 고프면 먹고 있어.”

“머그면… 살쪄어…”

“안돼! 굶지 말고 잘 먹고 있어!”

“으으으음”


나는 가만히 옆으로 돌아 누워


사락사락-

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빗어 내리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더 있고 싶다.’


아쉬운 바람을 뒤로 하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빠 나 다녀올게. 이따 봐~”


그러자 문은 조건반사라도 하듯 “으으으음” 소리와 함께, 그러나 눈은 감은 채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아기를 눕히듯 그의 목을 받쳐 다시 침대에 뉘이며 말했다.


“일어나지 마. 나오지 말고, 잘 자고 있어요~”


그러고는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는데 들리는 소리.


“쑥이… 차 조심하고…”

“길 건널 때 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웅얼웅얼 잠꼬대 같은 잔소리를 들으며 출근길을 나섰다. 이상하게 월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틀림없이 문 때문이다. 문의 배웅으로 집을 나섰고, 집에 돌아갔을 때도 문이 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내 공간이 그의 하루가 된다니, 그 사실은 나를 들뜨게 한다.


내가 출근한 사이, 가끔 문은 내 공간의 주인이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우렁도령’을 둔 기분이다. 실제로 나의 우렁도령과 설화 속 우렁각시는 닮은 면이 있다.


우렁각시 속 가난한 청년은 부모 없이 홀로 들판을 일구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 겨우 두 끼를 먹으며 집을 돌볼 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는 청년의 집이 어느 날부터 따끈한 쌀밥과 맛있는 반찬은 물론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우렁각시의 소행이었다.


우리 집도 그랬다. 문이 집을 지키는 날이면 집의 작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세면대 물 빠짐이 쏙 말끔해지고, 세탁기 배수로가 역류하던 것이 더 이상 없었다. 자꾸만 목이 꺾이던 헤어 드라이기, 삐뚤게 닫히던 욕실 상부장, 약해져 있던 변기 수압까지, 잔고장이 나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멀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문은 공대생답게 수리가 필요한 곳들을 귀신같이 알아챘고, 뚝딱뚝딱 고쳐놓고는 했다.

집에 없는 물건이 새로 생겨 있기도 했다. 이를 테면 후라이팬.


자취 시작할 때 산 후라이팬이 연식이 다 했는지 코팅이 거의 다 벗겨졌었다. 하지만 그런 대로 쓸만 해서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설거지할 때 살짝 성가신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집에 오니 말끔하게 코팅된 후라이팬이 인덕션 위에 턱- 올려져 있었다. 그것도 우리 집 인덕션과 딱 맞는 크기로.


“후라이팬 샀다네. 크기는 인덕션 화구 중에서 큰 쪽에 맞춰서 샀어.”


문이 새로 들인 새 후라이팬을 사용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불편하게 살았는지 깨달았다. 문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소한 불편까지도 눈여겨보고 고쳐주는 사람이었다. 주방에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 올려져 있는 날도 있었다.


“그거 칼갈이! 쑥이네 칼 잘 안 드는 것 같아서 다이소에서 칼갈이 사왔어. 이거 동생이 좋다고 추천해줬어!”

칼이 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주방에서 칼을 사용했다는 얘기고, 그 얘기인즉슨 문은 내가 없는 사이 요리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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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집안 가득 펴져있었다. 문이 따뜻한 토마토스튜를 끓여 놓은 것이다. 토마토, 양파, 브로콜리, 당근 등 야채와 소고기를 듬뿍 넣어 스튜를 냄비 가득 끓이고는 한 번 먹을 분량 만큼씩 소분해두었다고 했다. 야채 손질하는 게 제법 귀찮았을 법도 한데 좁은 부엌에 서서 야채를 손질하고, 고기를 볶고, 냄비 앞에 꼭 붙어서 스튜를 저었을 문을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주지?’ 생각하는데 주방에 방울방울 튄 토마토스튜 자국을 보고는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그날은 냄비가 너무 작다며 ‘다음엔 꼭 큰 냄비를 사야 한다’는 문을 말리느라 오히려 내가 혼이 났다.


문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에 문이 배웅하던 내 발걸음보다 훨씬 더 가볍고 빨라진다. 아침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말 한 마디 건네기도 어려워 보이던 그 사람이, 내가 없는 동안 내 공간에서 하루를 바지런히 보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끔하고 태평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니까. 익숙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부드러워진다.


그렇다. 문이 우리 집에 오는 게 반가운 이유는 그가 우렁도령이기 때문이 아니다. 존재만으로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사람이니까. 문이 있으면 작은 우리 집에 평화와 안정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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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왜 굳이 이 작은 원룸을 자꾸 찾는 걸까. 우리 집은 문제 집해 비해 매우 좁아 공간분리는 고사하고서라도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는 구역도 넉넉치 않은데. 집돌이에 잠꾸러기인 문이 쉬기엔 본인 집이 훨씬 편할 텐데도 문은 왜 자꾸 이 작은 공간에 오는 걸까. 문이 우리 집을 찾는 순간은 보통 이럴 때다. 문은 연차나 쉬는 날이면 꼭 우리 집을 찾는다.


“쑥쑥이, 나 가도 돼?”


나는 평일 9시부터 6시까지 일하지만, 문은 교대 근무를 한다. 그래서 그가 쉴 때면, 나는 늘 집을 비우고 있지만 꼭 우리 집을 찾는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문이 일주일 내내 온라인 진급 교육을 듣는 주간이 있었다. 문은 주말부터 노트북을 짊어지고는 우리 집으로 와서는 꼬박 일주일을 보냈다.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작은 공간이 문의 사무실이었던 셈이다. 아무래도 갑갑할 것 같은데 광역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우리 집에 오는 문이 반갑고 좋은 것과 별개로 의아했다. 그러다 문이 우리 집을 찾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날이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나 내일 쑥이네로 가도 되나?”


갑작스러운 외할머니 상으로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있는 문에게서 온 메시지. 내일 발인까지 외할머니를 잘 보내드린 후 우리 집으로 와도 되냐는 것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 문은 불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웅크려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 조용한 숨. 나를 보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문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날 밤 잠든 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갑작스런 장례로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을 텐데, 깊은 쉼이 필요했을 텐데 여기로 오다니… 문이 지쳤을 때, 크고 작은 위로가 필요할 때, 나는 문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여정 속에서 사랑하는 엄마를 지병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나는 17년 전, 문은 3년 전. 각자 큰 상실을 겪은 후 상실을 극복한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앞으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인생의 고난이라는 게 온다면 그때 나는 문 옆에, 문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문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이상한 욕심, 그러니까 문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문이 혼자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아프고 속상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슬픔을 겪고 나를 찾아온 문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문이 찾아올 수 있는 사람, 문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문이 우리 집을 찾는 이유는 공간의 어떠함에 있지 않다는 것. 우리 집은 내 공간이고, 그곳엔 언제나 내가 있기 때문에.


함께 산다거나, 결혼이라는 말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지만 문이 내 공간을 자신의 쉼터 삼고, 내가 그를 위한 자리를 항상 비워두듯 언젠가는 정말로 우리가 한 공간을 우리의 쉼터, 우리의 집을 삼아 함께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되는 지금이 왠지 조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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