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씻을 사람?

샤워는 언제나 귀찮아

by 쑥자람

“경은아 너 먼저 씻을래?”

“아니 언니 먼저 씻어.”

“왜? 언니가 양보할게~”

“하기 싫은 거 먼저 하라고 하는 게 양보냐…?”


김가네 사남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씻는 순서에 게으름을 부렸다. 저녁이면 늘 같은 대화가 오갔다.


“먼저 씻을 사람??”

“너 먼저 씻어.”

“아냐, 언니 먼저 씻어.”


“먼저 씻어.”

이 단순한 네 글자는 모두의 바람을 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소파에 널브러져 있고 싶은 마음, 드라마 한 장면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 몸을 일으키는 순간 찾아올 귀찮음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


더운 여름도 예외는 없었다. 에어컨이 오랫동안 없었던 터라 우리는 집에 오면 땀으로 눅눅했다. 선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끈적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선풍기 한 대씩을 끌어 안고서는 씻는 순서를 미루기만 했다. 귀찮음이 더위와 끈적임을 이기는 것이다.


겨울은 또 다른 이유로 씻기 싫었다. 옷을 벗는 순간 닥쳐올 냉기를 알기 때문에 옷을 벗는 것조차 싫었다. 욕실은 춥고, 온수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그 몇 초 참는 건 왜 그렇게 괴로운지 따뜻한 물줄기가 온몸을 적실 때까지 온갖 투덜거림이 터져 나왔다. 씻고 나면 개운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씻기 전만큼은 언제나 귀찮음의 압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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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먼저 씻을래?”

“아니! 쑥이 먼저 씻어!”


세상에. 씻기 싫은 마음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다. 이 대화를 남자친구와 이렇게 반복하게 될 줄이야. 잠들기 전 문과 나의 풍경은 어린 시절 우리 집과 다를 바 없다. 둘 다 씻는 게 너무 성가셔서 서로를 떠밀 뿐이다.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관찰하기도 하고, 반쯤 눕듯 기대 누워있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가끔은 문처럼 씻지 않고 자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침대와 서로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그럴 수는 없다. 결국엔 누가 먼저 씻을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때 등장하는 것, 만국 공통 게임 가위바위보.


“지는 사람 먼저 군말 없이 씻는 거다?”

“콜!”

“가위바위보!”


확률에 근거한 게임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가위바위보일진대 놀랍게도, 아니 어처구니없게도 매번 먼저 씻게 되는 쪽은 나다. ‘진 사람이 먼저 씻기’ 하면 내가 지고, ‘이긴 사람이 먼저 씻기’ 하면 내가 이겨서 결국 씻는 건 늘 나다. 단판 승부를 하든 삼세판을 하든 상관 없다. 마치 규칙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듯 결과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악! 아무래도 이상해! 왜 맨날 내가 먼저 씻게 되는거야?”


몇 번 억울하다고 징징대기도 했지만 규칙은 규칙이다. 먼저 씻으러 가는 건 언제나 나다.

“흐아 나 씻는다 으으 귀찮아~”

하며 느릿느릿 욕실로 향하면


“씻겨줄까?”

하는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나는 -_- 이 표정으로 그를 한번 노려본 후 욕실 문을 걸어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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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떠밀려 욕실에 들어갔어도 뜨거운 물에 몸 담그듯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흠뻑 맞고 있으면 금세 기분이 전환된다. 하루의 먼지와 피로를 씻어내면 역시나 개운하고 상쾌하다. 여기서 포인트, 상쾌한 건 내 육체만이 아니다. 해야 할 과업을 끝내는 자의 마음은 가볍고 위풍당당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욕실을 나올 때면 마치 작은 전쟁에서 막 승리를 하고 돌아온 병사가 된 기분이다.


“난 씻었다! 오빠, 지금 내가 제일 부럽지?”


그러면 문은 여전히 의자에 기대 누운 채로 대답한다.


“쑥쑥이 왜이렇게 빨리 씻었어~~”


묘한 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한 마디. 조금 전의 패자가 승자가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한 순간.


문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나는 “여기 갈아입을 옷”하며 새 옷을 들려준다. 터덜터덜 욕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문이 아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이 욕실로 들어가면 자유시간이 시작된다. 수건으로 감싼 젖은 머리를 풀어 헤친 후 침대 끝에 머리를 걸치고 눕는다. 검은 폭포수처럼 바닥으로 촤르르 늘어뜨러진 머리카락 방향으로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 놓으면 세상 시원하고 뽀송한 자유시간 시작이다. 머리숱이 워낙 많은 데다가 긴 머리인지라 머리를 잘 말려줘야 하지만 이 많은 머리를 매번 드라이어로 말린다는 건 영 성가신 일이다. ‘조금 덜 마르면 어때? 두피에 큰일이라도 나겠어?’하는 심정으로 언제나처럼 선풍기에 모발을 맡길 뿐이다.


그렇게 누워서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다리를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옆으로 쫙쫙 찢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문이 있을 때 차마 배출하지 못한 방귀도 배출하면)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문이 씻는 동안 주어진 이 짧고도 사소한 자유 시간은 먼저 씻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보송보송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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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
욕실 물소리가 멎고,

드르륵—
욕실 문이 열리고,

위이잉—
헤어드라이어가 울린다. 그럼 문이 다 씻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소리.


“쑥쑥이~”


그 부름에 맞춰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방금까지 내가 뒹굴던 자리에 문이 눕고, 나는 그 곁에 앉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양 볼에 토너패드를 붙이고, 로션을 발라 부드럽게 마사지해준다.


“흐으아아~”


문은 꼭 만화 속 캐릭터처럼 요상한 추임새를 내뱉는다. 나는 피식 웃고, 그는 눈을 감는다.


우리의 밤은 늘 이렇게, 귀찮음 끝에 찾아오는 작은 보상으로 마무리된다. 씻기 싫다며 미루고 미루던 시간이 결국엔 서로의 어깨를 만져주고,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별것 아닌 루틴 같지만, 하루의 끝에 남는 건 바로 이 따뜻한 손길과 웃음소리다.


그리고 나는 안다. 매일밤 똑같은 실랑이가 시작될 거라는 걸. 이 실랑이가 멈추는 날이 올까? 뭐, 멈추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 끝은 항상 해피엔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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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끔은 바란다. 언젠가는 꼭 가위바위보가 내 편을 들어줘서 문을 먼저 씻게 만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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