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요?
바람이 불었어요.
바람은 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람은 소녀가 태어나던 날 생각했어요.
'이렇게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구나.'
바람은 소녀를 만나게 된 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람은 그날부터 소녀를 사랑하게 됐어요.
그리고 항상 소녀를 지켜줬죠.
소녀에게 먼지가 가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무더운 날이면 솔솔 기분 좋은 바람을 불어
소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어요.
해님이 있었어요.
해님도 소녀가 태어나는 날 바람 뒤에서 소녀를 바라봤지요.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을 추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어요.
얼굴에 솜털이 보송한 소녀의 얼굴이 그을릴까 봐 걱정됐거든요.
맞아요, 해님도 소녀를 사랑하게 됐어요.
해님도 항상 소녀를 바라봤어요.
그리고 지켜줬죠.
바람이 차가운 날에는 소녀의 손발이 얼지 않도록 따뜻한 공기를 불었어요.
소녀가 그늘이 없는 곳을 지나갈 때는 얼굴이 타지 않도록 바람 뒤에 숨어들었죠.
바람과 해님의 사랑 덕분에 소녀는 건강하게 자라 어느덧 성인이 되었어요.
소녀의 눈매는 총명함으로 가득 차 또렷이 빛났어요.
소녀는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했죠.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소녀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바람에 배를 실어 떠나기로 했죠.
바람은 소녀의 배가 바닷물을 타고 멀리 갈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해님도 소녀의 여행길이 고되지 않도록 바람 뒤에 숨어 그녀를 응원했지요.
소녀는 원하던 대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하고,
가끔은 의도를 품은 자들을 만나 속임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소녀는 넘어지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그리고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훌륭한 사람이 됐을까요? 널리 이름을 알려 유명한 사람이 됐을까요?
소녀는 어떤 사람도 되지 않았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어요.
바람과 해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소녀는 지금도 여행을 하고 있어요.
나를 찾는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어느 날 감자가 물었어요.
"엄마, 언제까지 감자 옆에 있을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있잖아. 엄마 아빠 언제 죽어?"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감자 입에서 나오다니. 저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아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죠. 혹시 우리 감자에게 뭔가 불안한 심리가 있던 걸까. 저와 남편이 감자 앞에서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이유로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걱정스러웠어요.
"감자야,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신데렐라는 엄마 아빠가 없잖아. 백설공주도 엄마가 없고."
그제야 감자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됐는지 알게 됐어요. 엄마 아빠가 디즈니 덕후인지라 감자도 자연스레 디즈니 프린세스의 세계에 빠지게 됐는데요. 저도 감자에게 디즈니 프린세스 책을 읽어줄 때마다 항상 맘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어요. 바로 공주들은 하나같이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점이었어요. 감자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책을 읽어주면서 내심 걱정이 되던 부분이었는데. 역시나 감자는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었죠.
"감자야, 엄마 아빠는 어디 안 가고 감자 옆에 오래오래 있을 거야."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얘기하는 우리 꼬마감자는, 한해 한해 성장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겠지요. 점점 엄마 아빠의 자리는 좁아지고 친구, 남자친구, 꿈, 도전 등이 채워지며 자아를 형성해 나갈 거예요. 어떤 색을 채운 어른으로 성장할지 궁금하고 건강한 어른이 되어 엄마 아빠의 자리보다 다른 세계가 두껍게 자리를 잡았으면 싶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섭섭한 마음이 들까요? 성인이 된 감자를 상상해 보며 걱정스러움 보단 섭섭함이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를 섭섭하게 만드는 감자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제가 바라는 섭섭한 모습은 멀리 떠나는 모습이에요. 감자가 항상 제 품 안에 자식으로 남기보다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멀리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배를 타고 떠나듯 멀리 떠나는 감자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의 감자에게도, 성인이 된 감자에게도 말해주고 싶네요.
"엄마 아빠는 항상 여기서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