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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길을 만들었는가 EP.9 — 이정표

"왜 이정표의 글자는 매번 지워져 있는가"

by 쉼표


프롤로그

이정표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이정표는 글자가 지워져 있다. 매일 같은 자리, 매일 같은 자국. 누가 지운 걸까. 그리고— 왜 지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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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빛은 낮과 밤의 경계. 그림자는 길게 찢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부드럽게 원래대로 돌아온다. 시간이 억지로 이어 붙인 필름처럼 덜컥거린다.

이정표는 EP.1의 그것과 같다. 아니, 정확히 '완전히' 같다.


Scene 1 — 이정표에 다시 도착한 순간

Simp와 Road는 말없이 걸어 결국 이정표 앞에 선다.

Simp: 여기… 처음 왔던 그 자리야.

Road: 응.

Simp는 이정표를 바라본다.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이정표의 표면은 차갑고 단단하다. 그러나—

Simp: 이거… 지워진 자국이 어제랑 똑같아.

Road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Simp: 아니, '똑같아'가 아니라… '같은 자국'이야. 어제 지워진 그대로, 그저께 지워진 그대로. 매일.

Road의 숨이 얕아진다.


Scene 2 — 이정표가 '적막한 물체'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바람은 없다. 길은 조용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정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확실히 '뭔가를 감추는 물체'처럼 느껴진다.

Simp: Road. 이 이정표… 누가 지운 거야?

Road: …

Simp: 네가 지운 거 아니지?

Road: 아니야.

Simp: 그럼 누가?

Road는 바로 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길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Scene 3 — 이정표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

Simp는 갑자기 이정표의 표면을 세게 밀어 본다.

그 순간— 이정표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Road: Simp, 안 돼—!

하지만 이미 Simp는 느껴버렸다.

Simp: … 움직였어.

Road: 느낌일 거야.

Simp: 아니야. 분명히… 표면 아래에서 뭔가 '눌린' 느낌이었어.

Road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거의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Road: … 안쪽에 뭐가 있어.

Simp의 표정이 굳는다.

Simp: 안쪽에… 뭐?

Road: 글자. 원래… 쓰여 있던 말.

Simp: 근데 왜 지워져 있어?

Road: 누가 지웠어.

Simp: 누가?

Road: …이 길을 만든 존재.

Simp가 숨을 삼킨다.

Simp: 그 존재가 우리가 목적지를 아는 걸 막고 있다는 말이야?

Road는 대답 대신 이정표를 바라본다.

그 표면이 천천히, Simp가 만진 자리부터 미세하게… 갈라졌다가— 다시 붙는다.

이정표가 스스로 원상 복구하는 소리 없는 움직임.


Scene 4 — EP.10 '목소리'로 이어지는 첫 암시

Simp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Simp: 이정표가… 살아 있어.

Road: 살아 있는 건 아니야.

Simp: 그럼 뭐야?

Road: … 기억하는 거야.

Simp: 뭘?

Road는 침묵한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한다.

Road: 누가… 우리에게 "가라"라고 했는지.

Simp의 심장이 크게 쿵 떨어진다.

Simp: Road… 그 목소리… 나한테 들렸었던 그 목소리… 이정표도 알고 있어?

Road는 대답을 피한다. 그러나 피하는 그 자체가 대답이다.

Simp: …그 목소리,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길 전체가 조용해진다.

그 침묵은 바람조차 없는 침묵이 아니라— 누군가가 숨을 멈춘 침묵.

Road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Road: Simp. 그 목소리는… 네가 듣도록 만들어졌어. 그리고 오늘— 이정표도 그걸 기억하고 있어.

Simp의 눈이 크게 열린다.

Simp: …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 아니네.

Road: (작게) 이 길 전체가 기억하고 있어.

길, 흙, 그림자, 그리고 이정표까지— 전부가 듣고 있고, 보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

Simp는 두려움과 깨달음 사이에서 천천히 말한다.

Simp: 그럼… 우리를 여기로 보낸 것도— 그 목소리겠네.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Road의 눈이 흔들리고, 그 침묵이 대답이 된다.

Simp는 이정표를 다시 바라본다. 지워진 글자 자국. 그 아래 묻힌 말.

그리고 아주 낮게 중얼거린다.

Simp: … 언젠가, 저 글자를 읽게 될 거야.

이정표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진다.

[EP.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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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출발: "왜 걷기 시작했는가"

EP.2 반복: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EP.3 기억: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가"

EP.4 시간: "이 세계의 시간은 왜 멈춘 것처럼 흐르는가"

EP.5 멈춤: "멈추면 왜 안 되는가"

EP.6 기원: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EP.7 균열: "Road는 왜 도착을 두려워하는가"

EP.8 흔들림: "Simp는 왜 멈추고 싶은가"

→ 다음 에피소드 EP.10 목소리: "그 목소리는 누구인가" (coming soon)


작가의 말

이정표는 방향을 알려줍니다.

"이쪽으로 가면 어디에 도착한다"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정표를 믿고 걷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정표의 글자가 지워져 있다면? 만약, 누군가 일부러 지운 거라면? 만약, 이정표 자체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Road가 오늘 말했습니다.

"이 길 전체가 기억하고 있어."

길도, 흙도, 그림자도, 이정표도. 전부가 듣고, 보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EP.10에서는 '목소리'를 이야기합니다. 그 목소리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에게 "가라"라고 했을까요.

당신을 어딘가로 보낸 목소리는, 누구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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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10 '목소리'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