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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아버지의 기록』
시리즈 제1편 푸른 구름의 언덕

마음은 늘 그 곁에 머무릅니다

by 쉼표


프롤로그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언덕.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5년의 기억. 그곳에서 나는 배웠다.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바람이 불면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것을. 아버지가 51세에 선택한 이름, 청운(靑雲). 그 푸른 구름의 의미를 이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청운(靑雲), 아버지의 기록』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본문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마음 한쪽이 저릿해진다.

낮게 깔린 흙냄새. 골짜기 너머의 푸른빛. 나뭇잎이 스치는 고요한 음색.

어느 순간 갑자기 되살아나 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바람의 뒤편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서 있다.

아버지.

그 언덕은 내가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5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길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품이 머물던 장소였다.

언덕길은 계절마다 다른 빛을 품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건 아버지의 걸음이었다.

늘 일정한 속도, 늘 조용한 숨결, 그리고 늘 나를 기다려주던 넉넉한 마음.

우리는 그 언덕을 천천히 오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었고, 어린 나는 그 침묵이 불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건네던 침묵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라 내 마음이 스스로 자리 잡기를 허락하는 깊은 배려였다는 것을.

아버지가 51세 되던 해, 붓을 들기 시작했다. 호는 청운(靑雲). 푸른 구름.

나는 열한 살이었고, 그 이름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이름에는 아버지의 삶 전체가 들어 있었다.

가볍게 떠오르되 흐트러지지 않고, 형태는 흐리지만 방향은 분명한, 그런 사람.

그런 마음.

그런 숨결.

아버지는 이른 새벽, 마당의 작은 평상에 앉아 종이에 푸른 먹을 올렸다.

붓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먹물이 번지며 만드는 고요한 파문.

그 시간은 하루의 가장 고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종이 위에 번지던 그 푸른빛을 기억한다. 그 빛이 언덕의 하늘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일상은 그저 담담했고, 그 담담함은 오랫동안 나의 마음 깊은 곳에 흔적처럼 남았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청운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속에서 바람처럼 스며든다.

그 언덕은 이제 더 이상 같은 모습이 아니다.

주변의 나무도 조금씩 자리를 옮겼고, 길가의 작은 돌멩이들도 시간과 함께 흩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언덕을 떠올릴 때마다 늘 같은 장면을 본다.

맑은 바람. 푸른 하늘. 허리를 곧게 펴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조각나 있다.

사라지고, 희미해지고, 때로는 번져버리지만 어떤 조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며 지금의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아버지와 함께 걷던 그 언덕의 조각들.

주머니 속에서 따뜻하게 흔들리던 작은 손. 내 이름을 부르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오늘도 마음 한쪽을 지키고 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아버지가 남긴 건 인생에 대한 크고 거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지나치지 않을 만큼의 느린 속도였다는 것을.

삶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다는 허락을,

언덕 아래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한 번쯤 숨을 고를 수 있다는 여유를,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저 바람을 맞으며 서 있어도 충분하다는 위로를.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난 후, 나는 오래도록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왜 그 언덕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걸까. 왜 바람이 불면 그 시절이 되살아나는 걸까.

이제는 안다.

아버지는 떠난 것이 아니라 언덕의 바람 안에, 빛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마음이 그 곁에 머무르는 건 미련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도.

나는 가끔 눈을 감는다.

그러면 실바람이 조용히 내 어깨를 스친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옛날의 나를 본다.

아버지와 나란히 걷던 아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웃던 아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아버지의 청운이 이제는 내 삶의 리듬이 되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고요함을 닮아가고, 그의 여백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침묵의 뜻을 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그 언덕의 작은 조각들은

결코 흩어진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조각들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오늘도 마음 한쪽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다.

그 언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잃은 그 길이

내 마음의 가장 따뜻한 자리로 남았다.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배운다.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것.

바람이 불면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것.

사랑은 떠난 뒤에도 형태를 바꿔 계속 머문다는 것.

아버지가 떠난 날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은 늘 그 언덕의 곁에 머문다.

이제는 아프지 않게 머물고,

조용히 사랑으로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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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여러 번 그 언덕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5년의 시간은

지금도 제 삶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편에서는 그 언덕의 기억을 담았습니다.

2편에서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왜 '청운(靑雲)'이라는 이름을 택했을까.

51년을 살아온 한 사람이

스스로를 푸른 구름이라 부르기로 했을 때,

그 안에는 어떤 청춘이 담겨 있었을까.

한 사람의 삶이 한 글자 한 글자 이름이 되기까지,

그 이야기를 2편에서 풀어놓으려 합니다.

**『청운, 아버지의 기록』 시리즈 제2편**

**청운(靑雲) - 아버지의 청춘을 모아둔 이름**

곧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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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1편 끝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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