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이 만든 것들"

"종료 버튼 앞에 섰다. 57년의 무게가 손끝에 걸려 있었다."

by 쉼표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자리에서, 처음으로 우리 역사를 온전히 말할 수 있었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57년 회사의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던 날. 누군가 우연히 찾아왔고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1968년 대한항공 제품 생산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에서는 2000명이 넘게 일했고, 2016년 폐쇄 후 베트남으로 넘어와 900명 규모로 다시 시작했다고도 했다. 지금은 100명이라고. 10년째 베트남에서 견디고 있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마지막 설명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말하면서도 느낌으로,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됐다. 10년 동안의 희로애락을. 웃고 울던 시절들을.


개성은 닫아서 힘들었고, 베트남은 시작이어서 힘들었고, 이제는 모든 걸 접어야 해서 힘들었다.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견디고 버텨온 시간들뿐이었으니까.


2000명에서 900명으로, 900명에서 100명으로. 숫자로 말하면 간단했다. 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사람이 있었고, 시간이 있었고, 선택이 있었다. 그 안엔 견딤이 있었다.


"베트남 다낭 의류 제조 우리 공장 내부. 앞쪽은 빈 작업대들이 놓여있고, 뒤쪽에서는 100명의 직원들이 재봉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회사에 남은 인원 100명KakaoTalk_20260103_080109406.jpg "베트남 현지 공장내부 900명에서 100명으로. 남은 이들이 지키고 있는 베트남 10년의 현재시간."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상대방이 말했다. 같이 일하고 싶다고. 파트너십으로. 본사-지사 관계로. 무제한 오더로.


어벙벙했다.


사실로 받아들여도 될까. 반신반의했다. 샘플을 만들었다. 단 한 장. 이틀 동안 시간은 더디게 갔다. 초조했다. 아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기적 같은 시간들이 그냥 지나가면 어쩌지?


"회사는 코로나를 겪었다. 오더는 줄었고, 버티는 게 전부였다. 한 달 후면 종료 버튼을 누르면 되는 상태였다."


기분이 묘했다. 하늘이 돕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마음은 담담했고,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기쁨보다는... 왠지 마음 상태가 그러했다. 안 믿어져서 그랬을 것이다.


샘플 컨펌이 났다. 오케이.


7,400 pcs 바지 한 스타일. 그다음은 바람막이 점퍼 한 스타일에 150,000 pcs. 1월 5일부터 원부자재 입고 후 바로 생산.


숫자가 구체적으로 정해지니 조금 실감이 났다. 동료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 고마웠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제야 생각했다.


멈추려 했기에, 끝이라 생각했기에, 대표는 처음으로 우리 역사를 온전히 말할 수 있었다. 57년을 정리하며 보였던 것들. 기계 목록을 작성하고, 재고를 정리하고, 종료 버튼 앞에 서 있었기에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시간들.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됐지만, 역사가 답했다.


견디고 버텨온 시간들이 신뢰가 되었고, 그 신뢰가 샘플 한 장으로 증명되었고, 그 한 장이 150,000 pcs가 되었다.


1968년부터 2026년까지. 대한항공에서 개성공단으로, 개성공단에서 베트남으로, 그리고 이제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2000명이 900명이 되고, 900명이 100명이 되는 동안, 무엇이 남았을까.


기술도 남았고, 사람도 남았지만, 가장 남은 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견딤.


멈춤 앞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끝이라 생각한 자리에서 시작이 온다. 57년의 무게가 하루 만에 새 파트너를 만든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1월 5일, 원부자재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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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장은 돌아가고, 동료들은 웃고, 시간은 흐릅니다.


이 모든 일은 혼자 견뎌온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대표님을 비롯해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 그들의 노고가 함께한 결과였습니다.


멈춤이 만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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