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달라진 것이 있을 줄 알았다.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글로 꺼내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다. 문장으로 정리하면 감정도 정리될 줄 알았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랬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들이 손끝을 통해 밖으로 나왔고, 나오고 나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한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글로 꺼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쓰고 나면 사라질 줄 알았던 마음이,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거기 있었다. 모양이 조금 달라졌을 뿐, 무게는 그대로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도 꿈속의 감정만은 몸에 배어 있는 것처럼, 글을 써도 빠져나가지 않는 마음들이 분명히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쓰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한 단어를 찾으면, 더 솔직하게 쓰면, 그 마음도 풀릴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같은 감정을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써봤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글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마음은 애초에 해소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사라지지 않는 마음 앞에서 나는 한동안 무력했다. 썼는데도 남아 있다면, 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놓아야 하는 건가, 안고 가야 하는 건가. 답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억지로 꺼내지도, 억지로 묻지도 않고, 거기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남아 있는 마음이 나를 괴롭히는 대신, 조용히 말을 걸기 시작했다. 새벽에 눈을 뜨고 책상 앞에 앉으면, 오늘은 무엇을 쓸까 생각하기도 전에 그 마음이 먼저 와 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글이 되었다. 어제 쓴 글과 다른, 오늘의 글이 되었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마음들은 한 번 쓴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 편의 글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편의 글에 걸쳐 천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급하게 내보내려 할수록 도망가고, 가만히 두면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지 못한 마음은 사라져야 할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쓸 수 있었다. 다 풀리고 다 정리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것들이 나를 앉히고, 펜을 쥐게 하고, 오늘도 한 줄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내가 가장 좋은 글을 쓴 날은, 마음이 편안한 날이 아니라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는 날이었다. 해소되지 않은 것, 정리되지 않은 것, 이름 붙이지 못한 것이 가슴 어딘가에 걸려 있는 날. 그런 날에 쓴 문장들이 나중에 읽어보면 가장 솔직했고, 가장 나다웠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부족함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느끼고 있다는 것,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그 마음들이 있는 한, 나는 내일도 쓸 것이다.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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