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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

-통과(THROUGH)하는 우리

by 김종우


피디는 프로젝트 단위로 사는 사람이다.

프로젝트가 나 자신과 일치되면, 위험해지는 경우가 많다.

성공하면 에고가 부풀지만, 실패한다면?

'망한 그거 한 사람' 이 된다. 스태프들은 빠르게 흩어지고, 편집실을 내주고 이렇다할 인사도 없이 눈치를 보며 심지어 길게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회피전술도 쓰며..


창업자의 적나라한 운명에 아프게 공감하며 읽었다.


크게 벌였다가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받아들인 프로젝트의 파일들을 나는 아직 열어보지도 못한다.

모든 이해되지 않는 그때의 결정들이 되살아나서, 쳐다볼 수도 없다.

대체 왜 그랬는지, 왜 그런 스태프를 영입했는지, 이랬다면 어땠을지..

이 책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발견했다.


벤 호로위츠는 <하드씽>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회사가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도, 투자자도, 이사회도, 직원들도, 심지어 당신의 어머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일을 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비생산적인 후회에는 단 1초도 허비하지 말고, 모든 시간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궁리하는 데 쓰라고 그는 적는다. 결국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냥 회사를 운영하면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CEO를 위한 역사상 최고의 조언이라고 벤 호로위츠는 말한다.


후회하지 마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궁리해라.

내 경우에도 그랬다. 방송이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 분명한 가장 괴로운 순간에도, 도움이 된 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고민 뿐이었다.

물론 망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창업은 언제나 실패할 확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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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통과하는 힘' 퍼블리 박소령 님의 기록을 잘 읽었다.

콘텐츠 스타트업 퍼블리(PUBLY) 를 2015년에 세워서 10년간 이끌고, 2024년에 회사를 매각하고 나온 박소령 전 대표가 “원래는 공개 안 하려고 썼던” 창업·경영 기록을 통째로 기록한 책.

박소령작가는 10년간의 창업과 고군분투를 '실패'로 정의하면서 회사가 갑자기 성장하고, 좀처럼 영업이익을 맞추지 못하고, 갈등하고, 돈을 끌어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미팅을 하고, 결국 놓아주기로 결정하는 모든 과정을 자신의 속마음과 함께 디테일하게 기록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다른 부분들을 인용해본다.


모험은 실패가 디폴트 값이다. 실패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나. 창업가는 자신이 만든 사업의 실패를 정직하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나. VC는 투자한 스타트업의 실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LP(유한책임파트너)는 펀드 투자 실패를 수용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실패를 디폴트 값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벤처'는 떼고 그냥 '캐피털'이라고 하면 좋겠다.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가장 아픈 사람은 일을 벌인 창업자 (내 입장에서는 기획을 한 피디). 우리에게 투자하는 벤처캐피털(편성이나 예산 등)이여. 당신들과 함께 성공하고 싶지만, 실패는 언제나 나 혼자만의 몫이므로..오로지 나 혼자 모험을 하는 것.


저자는 퍼블리를 창업하고 구독자가 급증하는 성공을 맛보다가, 유료콘텐츠 시장의 한계를 절감하고 링크드인과 같은 커리어를 위한 네트워크 모델로 피벗팅한다. 그리고 많은 결정과 실패를 겪고, 10년만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회사를 매각하게 된다. 사실 실패도 성공도 아닌 그 여정에서 저자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향하게 된다.

내가 아닌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 남의 욕망이었던 것.. 재능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혼란 속에서 단 하나의 질문으로 향하게 된다.


이 책의 메시지를 하나로 응축한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깨닫게 된 10년의 여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에 창업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결정이 연동된다.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야만 후회를 최소화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더 큰 시장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더 높은 기업가치를 노릴 수 있다는 이유로 일하는 것은 나에게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잠깐은 할 수 있어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내 인생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프로그램을 런칭하거나 창업을 하는 이유가 자아실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내 분신과도 같은 프로젝트는, 결국 '내 것이 아닌 것'은 잘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준다.

트렌드를 분석하고 좋은 방법을 갖다붙여서 잘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실패하는 프로젝트가 없을 것이다.

다른 이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고고하게 '나는 어떤 사람이야'를 고집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업을 벌여보면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나 하나에 매달려 달려가는 이것에 대해, 나는 과연 어떤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지? 과연 확신이 있기나 한지? 그저 인기나 돈을 얻기 위해서 갖다붙인 것은 아닌지?

결국 성공과 실패는 그런 한끗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냥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 잘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은 것, 그러나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 잘 되었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 아니라 고객을 '계몽'하기 위한 제품을 만들 때 발생하는 잘못된 결정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몹시 뼈아팠다'고 회고하는 부분이 있다.

기업이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듯 프로그램도 고객의 문제해결 혹은 감동을 목표로 한다.

그러다가 '계몽'하려는 의도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다큐멘터리나 좋은 넌픽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도 새로움을 제시해서 독창적인 세계관에 가 닿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에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에 없던 것을 보여주겠어' 라는 강한 에고는 성장의 엔진도 되지만 관객이 알아주지 않는 경험이 누적되면 에고가 흑화되는 것이다.


평범한 콘텐츠 제작자에 불과하지만 나 역시도 저런 생각에 빠졌던 기억이 나서 순간적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퍼블리라는 콘텐츠 기업의 수익모델은 고품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구독 서비스였다. 그래서 특별해야 하고, 높은 교양의 힘을 가지고 구독자를 끌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료 서비스에 지갑을 열 만한 고객의 시장이 크지 않았고, 아마도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그 순간 좋은 내용의 콘텐츠에 관심없는 한국의 대중들을 향해 창업자는 끝없이 열정을 갖고 대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사람들은 그저 먹방 같은 걸 재미있어 해. 생각해야 하는 콘텐츠는 이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피터 드러커는 벤처 기업의 최대 위험은 제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객보다 우리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선보이는 시장 질서 속에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과의 아름다운 만남은 역시 무얼 그냥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에 있다. 만드는 사람보다도 더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번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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