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about making it through.
<실패를 통과하는 힘>을 읽으며. 두 번째 이야기
지식 구독 서비스를 창업한 퍼블리 박소령 님의 기록을 나의 일에 대입해 가면서 정신없이 읽고 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해본다. 이번에는 더 어두운 느낌이다.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 격렬한 기록이 부럽기도 하고, 나 역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시장규모 때문이다. 사업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다시 전자책에서 하이라이트로 표시해 놓은 부분.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을 했음에도 2019년 하반기 내내 유료 구독자 수는 5000명 선에서 정체되었음. 신규고객을 확보하면 거의 같은 수의 고객이 이탈하는 상황이 매달 반복됨. 고객들이 우리의 대체재로 고려하던 잡지나 커뮤니티들도 우리처럼 유료고객이 5000명 안팎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 '돈을 내고 최신 트렌드나 정보를 얻고자 하는 국내 시장의 규모가 애초에 그 정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음.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끝까지 발목을 잡은 지식/교양 콘텐츠 사업의 시장규모 한계가 결국 사업을 전환해 커리어 서비스로 피벗팅 한 이유라는 고백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업종은 달라도 비슷한 카테고리에서, 그저 잘 만들자는 생각으로 살아온 입장에선..
'과연 나는 시장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감동을 주고 상을 받아도, 시장이 없다면 의미가 있을까?
예술가조차, 아니 예술가야말로 열렬하게 시장을 분석하고 마케팅한다.
교양 피디라는 직업이 있었다. (지금도 이름은 그렇지만..) 그런데, 더 이상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일단 제작비를 투입하고 광고로 제작비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계획을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이 비대칭을 '지상파'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일종의 공영적인 콘텐츠를 공급함으로써 넘겨왔다.
이 정도는 해야 공영방송이라는, 상징자본에 기여함으로써 부족한 영업이익을 퉁쳤다는 얘기다.
그러나 광고시장이 축소되고 지상파 역시 수없이 많은 채널들 중의 하나로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그런 품위유지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기업과 지자체 등에 의미 있고 규모도 있는 다큐멘터리를 피칭하고, 제작지원을 받기도 했다. 여전히 이 영역은 남아 있지만, 근본적으로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이건 다른 사업들도 마찬가지겠다. 정부지원사업에만 매달려서 생존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자체적으로 투자하길 원한다면, 이런 건 돈을 좀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애걸해야 한다. 즉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야 한다.' 이런 상황은 애써 노력해 온 커리어를 허탈하게 만든다. 아무리 좋은 의도, 좋은 느낌을 준다고 해도 그런 결과물들은 지속가능할 수 없다. 결국 시장 속에서만 유효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어쩌겠는가? 영화 <어프렌티스> 속 도널드 트럼프의 대사를 빌리자면,
"Rule no.1. The world is a mess." (첫 번째 법칙, 세상은 엉망이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쨌든, 습관처럼 자꾸 '의미는 있다'는 변명으로 도망가려는 나와 달리 저자는 시장에서 제대로 붙어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의 기록대로라면, 퍼블리의 구독 서비스도 충성도가 높지는 않았다. 고객을 확보하면 매번 같은 수의 고객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열광하는 팬이라기보다 매번 평가하고 재구독을 고민하는 탐색자라는 얘기다. 이건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팬이 되면 굿즈를 내놓기 무섭게 싹쓸이하는 아이돌 팬덤과 너무 다르다.
카테고리를 잘못 택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의 지식 교양영역도 철수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지적인 갈증(그런 게 있다면)을 채울까?
유튜브다. 그것도 공짜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채널이 널려 있다. 영어권으로 확장한다면 지금만큼 혼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품질 높은 '좋은 이야기'라도 돈은 안 쓴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나에게 돌아오는 아웃풋이 있거나, 이거 없으면 살 수 없는 감정적인 결합을 주거나, 그 시간을 충분히 채우는 도파민을 주거나..
되는 지식이 있다. 돈을 벌게 해 주는 정보다. 주식, 부동산, '머니'에 대한 정보에 노출하는 데 월 몇만 원을 쓰는 건, 되돌아올 수익을 생각하면 지출할 만하다.
또 하나는 정치적인 팬덤을 만족시켜 주는 콘텐츠다. 넓게 보면 지식/교양 콘텐츠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의실현에 대한 강렬한 스토리, 논객의 퍼포먼스를 제공하지만 결국 '팬덤 장사'다.
입시학원도 일종의 지식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할 필요 없는 거대한 시장이다. 청소년 시장을 개척해야 할까..?
돈을 벌게 해 주든지, 좋은 학벌을 보장해 주든지, 외로운 나를 위로해 주든지, 소속감과 효능감을 느끼게 하든지.. 어쨌든 세상의 니드가 있는 시장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건 너무나 온당한 일이다.
나는 일을 하면서 이런 훈련을 잘 받지는 못했다. 그저 제대로 전달되고 감동이나 자각을 주는 영상을 만드는 훈련 만으로도 벅찼다.
알에서 깬 새끼 바다거북들이 수없이 잡아먹히고 나서 겨우 몇 %만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프로듀서가 되는 확률도 높지 않다. 수없이 많이 이탈하고 포기한다. 장인정신과 열정, 희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먼저 시장에 대한 감각을 배워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감독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펼칠 수 있어야 하지만, 팔려야 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팔리는 게 먼저다.
지식/콘텐츠 구독 사업을 하던 저자의 고군분투는 애초에 너무 어려운 게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조금은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약간 순진한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지향은 사업과는 상관이 없다.
퍼블리는 나도 구독한 적이 있다. 독점적인 정보나 기사가 많았고, 롱블랙 등과 함께 꽤나 화제성 있는 내용도 있었다. 트렌디함, 쿨함도 있었다.
사실 실패 이야기라고 써 놓았을 뿐 빠르게 성장한 프로젝트였다.
책에는 텍스트 기반인 정기구독 사업에서 확보한 고객 및 저자를 레버리지로 동영상 콘텐츠 신사업을 시작하고 커리어 서비스가 궤도에 오르면서, 유료 고객이 1만 명에 도달하는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읽는 사람도 흥분되고 짜릿한, 노력이 보상받고 모든 팀원이 한 마음이 되는 그날이다. 저자는 이 날을 이렇게 기록해 놓는다.
고기와 술을 무제한으로 먹고 마시며 그동안 함께 고생한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서로 웃고 울고 떠들던 기억이 잔뜩 남아 있음.
회식 중간에 조용히 빠져나와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축하는 한편 앞으로의 각오를 다짐함.
'회사 하면서 언제가 가장 기뻤어?'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행복한 추억임.
고깃집의 매캐함과 달콤함, 동료들의 흥분과 일치감... 왠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주인공이지만 천천히 흥분이 가시고 고요해지면서, 웃고 떠드는 팀원들을 남기고 조용히 빠져나오는 시간.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고, 앞으로를 생각하는 알 듯 모를 듯한, 몇 번 경험해 본 것 같기도 한 그런 날.
방송의 반응이 짜릿하게 왔을 때. 떠들썩한 후배들과 축하하다가 조용히 혼자 생각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기분이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일이란, 어쩌면 평생 몇 번 오지 않는 이런 날을 경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매출이 성장하는데 어째서 실패라고 말하는 걸까?
저자는 고민 끝에 결국 회사의 무게중심을 지식/정보 콘텐츠에서 링크드인과 같은 커리어 네트워크 서비스로 옮기는 피벗팅을 시도하는데, 이렇게 기록해 놓는다.
멤버십이 속한 디지털 지식/정보 콘텐츠 시장의 크기는 오랫동안 VC들로부터 받은 가장 큰 챌린지였음. "이게 돈이 되겠어?"라는 회의적 시선과 시장 크기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 실제로 6년간 이 시장에서 사업을 해보니, 스타트업이 시장 자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꼈음.
결국은 시장 규모에 대해 외부에서도 또 스스로도 의구심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그리고는 사활을 건 만큼 사업방식도 바꾼다. 받은 투자금을 써가면서 인원을 늘리고 규모를 키워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을 쓴 것.
'난생처음 만져 보는 큰돈 앞에서, 이 돈을 '어디에, 얼마큼,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의사결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이 시기의 의사결정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는데, 너무나 전형적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저자는 이 시기에 블리츠스케일링을 시도했다고 말하는데
블리츠스케일링(Blitzscaling)은 링크드인의 CEO 리드 호프먼이 말한 개념으로, 단기 효율을 희생하더라도 ‘속도’로 시장지배를 먼저 확보하는 초고속 성장 전략이다.
대규모 시장에서 1등을 먼저 먹기. 완벽·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과감한 투자로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고 규모의 경제를 선점하는 것. 마치 배달의 민족이나 쿠팡의 초창기 몇 년, 적자를 감수하고 시장을 접수하는 전략이다. 듣기만 해도 위험과 흥분이 느껴지는, 모 아니면 도의 길이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전까지 조심스럽고 내실 있게 비교적 소규모의 인원으로 꾸려오던 사업방식을 전환해 악전고투했으나 이익이 드라마틱하게 증가하지 않은 반면 고정 지출이 커진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잘못된 의사결정들, 시장의 미지근한 반응들, 기어이 '손절'하지 못한 과정들이 겹쳐..
결국은 회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 마음이 어땠을 것인가? 다만 저자는 대학원 수업에서의 '무도회장 VS 발코니 이론'을 인용하며
스스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돌아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로널드 하이페츠 교수의 리더십 강의 중 (...)
그가 쓴 <어댑티브 리더십 1: 발코니에 올라(변화를 이해하라)
The Practice of Adaptive Leadership>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스템을 진단하거나 자기 자신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거리를 두는 능력이 필요하다 (...) 무도회장 안에서 계속 춤을 추고 있으면 함께 춤추고 있거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만 보인다. (...) 하지만 당신이 발코니에 올라가면 무도회장과 사뭇 다른 광경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발코니와 무도회장을 계속 오가면서 당신은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평가하며 중간중간 행동을 수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 해고과정, 창업공신들과의 많은 감정들, 그리고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는 과정들이 있다.
너무 몰입하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위험신호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 혼자서 결정하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기 힘들다는 것. 이것은 모두 나중에 돌아볼 때야 알게 되는 것들이긴 하다.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가장 공감 갔던 것은 거절에 대한 기록이다. 투자를 바라고 피칭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작은 거절에도 마음이 심약해지던 차에, 우리는 이 '거절'을 익숙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초반에 한 번 삐끗하고 나니 끝이 나지 않았음. 8개월 동안 계속 VC를 만나고 또 만나면서, 나의 에고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경험을 함. 대학원 시절에도 에고가 산산조각 나는 시간을 겪어봤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음.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한다는 것의 혹독함을 강렬하게 배움. 우리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투자 거절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만들어온 내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음. 다른 스타트업들은 잘만 투자받는데 나는 왜 이렇지?
이건 정말.. 밤을 새워 피칭을 준비하고 나서 투자받는 데 실패해 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이제 투자 없이 제작하는 피디는 그냥 행복해 보인다. 밖에 나가서 줄 수 있는 가치를 설명하고 투자받을 때부터 다른 세상이다..
책의 후반부는 회사 매각에 대한 내용이라 많이 생소했다. 그러나 어떤 결심과 과정인지 나의 일에 빗대어 어렴풋이 짐작한다. 끝을 내는 것. 반응이 좋지 않은 프로젝트에서 쫑파티를 하고 스태프들을 보내고, 투자한 OTT 사람들과 관계를 정리하고, 출연자에게 마지막 선물을 보내고.. (사업을 접는 일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이런 일도 상당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에는 처음부터 함께 한 오른팔과 조용한 회식을 하고 보내야 한다. 시작할 때의 흥분도 떠들썩한 동료나 관중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한 사람이 끝내야 한다. 정중하고 정성스럽게.
2023년 6월에 결심하고 나서 끝을 내기까지 1년 2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수많은 실수와 굵직한 실패와 감정적 좌절을 맛보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내 손으로 직접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해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다.
자, 다시 결론은 '나'에게로 향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에서 '지피지기'란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나는 적을 파악하려고만 했지, '나'를 아는 것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때 나에게 해야 했던 딱 하나의 질문은 바로,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걸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좋아하나?"였다.'
참 많은 순간에서 경영적인 판단이 있었을 텐데, 어쨌든 결국 다시 '가슴에 손을 얹는' 일로 돌아오게 된다니.
곱씹어볼 일이다.
잡지도 사라지는 시대다. 다큐멘터리도 그렇고.
나중엔 그런 얘기로 추억하지 않을까? 옛날에는 약간의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고. 사람들이 뭔가를 알고 느끼고 싶어 하고 그런 걸 엮어서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아니, 아직은..
책을 덮고..
며칠 전, 교육 플랫폼 사업을 하는 대학교 동창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었다.
답답한 직장인 눈에는 한없이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대화를 할수록 많은 일을 겪어온 듯 살짝 초월한 느낌이 있었다. 매번 투입한 한계비용을 간당간당하게 넘어서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고스란히 이익이 될 수 있는데, 그게 좀처럼 어렵다고. 어쩌면 여기까지 왔는데도, 이제는 쉬고 싶은 마음도 반 정도라고..
직장에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사활을 거는 모든 사람, 창업을 하는 사람 모두 똑같이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르고, 그 궤도를 유지하려고 모든 에너지를 쓴다.
요즘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일의 온당함, 결과가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의 공평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어떤 벌어지는 일들과 운, 노력, 자원들..
수없이 많은 자기 계발 서적의 옳은 말들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 상황에서 (발코니에 오르지 못하고) 무도회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그때의 결정과 못난 일들까지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기분에는 왠지 한강 작가의 시를 한번 빌려오고 싶다. 비즈니스 얘기에는 전혀 어울리는 시가 아니지만.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 한강/ '서시' 중 -
막 갖다 붙였는데 사업과 프로젝트 이야기에 어울리진 않는다. 그러나 왠지 인생을 걸고 고군분투하는 모든 일들 - 사업이든 예술이든 정치적 여정이든 - 그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마지막에는 이런 순간을 마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에 '실패'를 써서 좋았다. 아무리 그 반대의 내용이라도, 스스로 실패를 말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실패에 대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콘텐츠가 아닐까 싶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거대한 물고기를 잡고는 상어와 사투를 벌이고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너무 멀리 나와서 노인이 풍랑을 만나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고 마을에서는 이미 수색작업이 벌어졌었는데, 새벽에 배 옆에 묶어놓은 고기가 뼈만 남은 채로 노인은 조용히 항구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말없이 배를 묶고 피범벅이 된 손과 기진맥진한 몸으로 초라한 오두막에 눕는다.
아침에 되고 사람들이 배에 묶인 거대한 뼈를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어린 마음에도, 영화처럼 생생했던 책의 페이지다.
<노인과 바다>를 어릴 때부터 수십 번 읽었는데, '인간은 죽을지 몰라도 실패하는 건 아니야'라는 노인의 대사였던가? 스토이시즘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때는 왜 물고기를 잡아온 이야기가 아니라 '잡았지만 결국 뼈만 남기고 배는 망가지고 손은 다 작살나서 돌아온' 이야기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자도 헤밍웨이를 좋아했는지, 책의 앞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연작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아무튼 모든 격렬한 싸움은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싸움터죠.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패배합니다. 물론 우린 누구나 유한한 존재이고, 결국은 패배하죠. 하지만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이기는 방법보다 패배하는 방법에 따라 최종적인 가치가 정해지는 겁니다."
도망가지 않기, 회피하지 않기.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다 읽고 나자, 실패라는 말은 사라지고 '통과'만 남는다.
어차피 인생은 모두 통과하는 일이고, 그 전의 나와 다른 나만이 남는 게 아닌가?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고 그 안에서 삶겨 죽는 개구리에 대한 비유를 많이 들어보았다. 적당한 온도에서 점차 열탕으로 바뀌고 있는 솥 안의 개구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어떤 끝이 준비되어 있든, 그렇게 격렬한 이야기를 써볼 생각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잘 읽었습니다. 아, 술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