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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적 가치가 절실한 대한민국

- '부유한 것'과 '행복한 것'이 다르다는 각성

물질적 풍요와 마음의 여유


한국에서 살다 프랑스로 이주해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분야 전문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두 나라의 문화를 비교하는 과정에 그분이 한 얘기다. 외국에 오래 살다 한국에 오면 "한국 생활은 너무 여유가 없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느낌"을 받는단다. 


 아마 그분의 말을 너무 바쁘게 살아가지만 인간적으로 멋지게 살지는 못하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한국에 살 때는 몰랐는데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너무 극명하게 비교가 된단다.


어쩌면 우리는 현대의 복잡한 생활 가운데 톱니바퀴처럼 주어진 틀 속에서 너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 사는 우리는 모르지만 선진 문화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 


물질의 여유는 나아졌지만 항상 채워지지 않는 욕구 충족을 위해 허덕이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그게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과 서열의 역문화와 졸속과 편법이 만연되는 사회풍토를 만들었다.


‘플로우적’ 행복가치 정립


그러나 진정한 사회적·개인적 행복의 요소는 분명 이런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고, 품격의 멋으로 덧입혀진 행복의 가치는 여유와 배려와 소통에 있다. 


그래서 이미 선진국에서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피니스’(happiness)라는 ‘욕구의 충족’에서 ‘플로우’(flow) 곧 ‘만족의 느낌’으로 의미를 새롭게 찾아가고 있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삶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자주 회의를 느낀다. 


물질만능주의는 오히려 정신적 공허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사회는 더욱 퇴폐적이게 되고 거칠어졌다. 

또 인간적인 감성이 메말라진 자리에는 기계적인 관성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게 되면서 부유한 것과 행복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첨단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정서를 단절시키고 사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희석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경이나 외부에서 얻어지는 충족보다도 내면에서 솟는 정신적인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창의적인 에너지 넘치는 사회 


플로우는 일종의 창의적인 에너지가 몸속에 ‘흐르는’ 것을 뜻한다. 플로우는 자신이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에 심취해 있을 때 만족과 기쁨이 온몸을 채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행복이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고여 있는 물이라면 플로우는 언제나 신선하게 찰랑대며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창의적인 에너지로 재충전을 하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진정 출세가 아닌 성공과 행복을 이루는 비결이다. 권력·명예·재력을 좇는 출세보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성공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멋지게 창의적인 삶으로 성공한 민족은 유대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탈무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탈무드적 인간이 갖춘 요소들은 배움의 정신, 삶의 여유, 무권위의 자유 평등 원칙, 개인성의 존중, 당당한 자세, 극단성의 배제, 건전한 성과, 가정의 가치 등이다.


그 어느 하나 요소라도 지금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유대인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은 열성적인 스타일이었을 것 같지만 실제는 여유 있는 유형의 탈무드적 인간이었다. 이것은 21세기 첨단 물질만능 세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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