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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든솔 Aug 04. 2024

추억 꺼내 듣기

나만의 타임머신

 해외여행 갈 때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향수를 꼭 하나씩 사요.
그리곤 여행 내내 그곳에서 산 향수만 뿌리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서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 배우 정유미

 예정에 없던 여행을 마쳤다. 글 쓸 곳이 필요해 지도를 열어 이곳저곳 뒤적이던 중 무심코 들어간 항공권 사이트에서 발견한 오사카행 항공권의 가격에 눈이 번쩍 떠졌다. 글을 쓰러 외국에 가는 삶이라. 상상만 해도 낭만이 넘쳐흘렀다. 곧바로 결제했다. 그렇게 3일 뒤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 5분 만에 정한 숙소와 함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본으로 출발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며,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새로운 곳에서 겪는 모든 경험이 글쓰기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 하나로 '글을 쓰러' 일본에 갔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는지 가까운 프로 여행러에게 전화를 걸어 혼자 여행하는 꿀팁을 전수받았다. 몇몇 알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음악 없이 산책하기'. 일단 알겠다고 했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라면 언제나 음악과 함께하는 나인데, 혼자 산책하는 가장 외로운 순간에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해봐야지.


  음악은 늘 나에겐 타임머신 같은 존재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때를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사진첩을 뒤적이는 것처럼, 나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들은 음악을 꺼내 듣는다. 덕분에 벅찬 순간을 함께한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때의 그 순간으로 잠시나마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여행에선 특히나 음악이 중요했다. 내가 다녀온 여행은 늘 벅찼고 늘 기억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번 여행에서 음악을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너무 가벼웠서였을까.


Hawaii / ♫ Moon Sujin & Jiselle - Only U ♫


 숙소에 도착한 후 침대에 누워 노트북부터 펼쳤다.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적어 내려갔다. 음악은 틀지 않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본어, 전철과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버무려져 들려왔다. 근사한 풍경이 보이는 숙소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이국적인 향이 묻어있는 풍경이 작은 창을 통해 눈에 비쳤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낸 뒤 저녁을 먹으러 숙소를 나섰다.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지만, 모든 순간 음악은 듣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작게 흐르는 강을 멀리서 보며 걸었다. 강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불빛을 보며 저곳이 가장 핫한 곳이겠거니 싶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인데 그곳이 오사카에서 가장 유명한 도톤보리라는 곳이었단다. 숙소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음악 없는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두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써놓은 글을 다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도 내 잔잔한 여행은 계속되었다. 글쓰기에 집중이 필요해 평소에도 즐겨 듣던 가사 없는 음악을 제외하곤 이번 여행의 추억이 담길만한 음악이 내 귀를 스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느 이자카야의 시끌벅적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귀를 파고들어 가슴에 박혔다.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 음악을 듣는 순간 여행에서의 모든 추억들이 음악 속에 담겼다. 담긴 추억들은 아직도 꺼내 듣는 걸 보면 이번 여행에서도 내겐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많았나 보다. 그렇게 이번 여행으로 돌아올 수 있는 타임머신이 하나 생겼다. 


Osaka / ♫ Kenshi Yonezu - Sayonara, Mata Itsuka! ♫


 아인슈타인이 1900년대에 발표한 상대성이론은, 시간이란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중력과 속도를 잘 버무린다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고무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움직이는 물체와, 중력을 받는 물체는 그렇지 않은 물체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속도와 중력에 의해 상대적인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여러 실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꽤나 가까운 일상에서도 사용된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대표적인 예이다. 내비게이션은 GPS 인공위성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작동한다. 하지만 GPS 인공위성은 약 20000km의 높이에서 아주 빠르게 지구를 공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의 시간과는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른다. 그 시간은 하루에 0.000038초. 아주 미세한 시간이지만 지상의 시계보다 빠르다. 너무 작아서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준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을 보정해주지 않으면 무려 10km나 되는 거리의 오차가 생기고 만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약 10km 정도 차이가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따위의 어이없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가까스로 막아준 것이다. 


 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시간을 다루는 것이 서툴지만, 먼 미래에는 공상과학 영화 속의 타임머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터스텔라' 속의 쿠퍼가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딸 머피를 만나는 것처럼, 내 후손을 만나 담소를 나눌 세상이 우리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 다만 아쉽게도 영화 '어벤저스'나 '터미네이터'처럼 우리가 염원하는 시간여행은 이론 상 불가능하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되감을 수는 없는 것이 상대성이론과 시간의 속성이다. 



Texas / ♫ DYHE - LUH! ♫


 하지만 나에게는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향수를 사서 그 순간을 추억하듯이 난 여행지에서의 음악을 통해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음악은 작은 타임머신과도 같다. 언제, 어디에 있든 그때 그곳에서의 추억을 선명히 재생시켜 준다. 이번 여행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도 내 재생목록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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