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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는 느린 것도 빠른 것도 없어요.

일출

by 유영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루 늦은 2025년 인사입니다. 아니, 앞으로 35분 뒤면 이틀 늦은 인사가 되겠네요. 어째서 안부를 묻는 게 늦었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쓰는 삶을 살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매일은 좀 부담스러워서 피한 결과가 이겁니다. 저라고 1월 1일에 멋지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원래 세상은 1등이 있으면 100등, 1000등도 있는 겁니다. 적어도 1월 4일에 시작할 사람보다는 한 발 앞섰다고 주장하고 싶네요.


새해에 해돋이는 보러 갔다 오셨나요. 저는 새해 달맞이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해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 떠 있는 건 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어주는 건 둥그런 달님이 먼저죠. 무려 오후 5시 반부터 주황색 돗자리를 깔고 슬금슬금 자리를 잡았잖아요. 그러니 먼저 인사를 건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추운 12월의 마지막 밤을 지켜주었으니까요. 상도덕 차원에서도 그러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 이번에 처음으로 달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속해있던 야(夜)당을 탈퇴한 셈입니다.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든 것도 모자라 새벽 6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갔어요. 물론, 제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옆에서 12년을 같이 한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주일 전부터 해를 보러 가자고 난리였어요. 8년을 같이 한 사람이랑 새벽에 우동 한 그릇을 먹고 싶대나 뭐래나. 나는 자고 있을 테니 둘이서 다녀오라는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더군요. 결국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신념을 꺾고 말았습니다. 변명이 길었다고요. 그것 참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새벽을 여는 드라이브는 참으로 기분이 좋더군요. 새로 뽑은 자동차의 최신식 공조기능 덕분에 몸은 곧 따뜻해졌어요. 어두웠던 밤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는 건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일몰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졸듯 말듯 머리를 기울인 8년 산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몇 번이나 저기 좀 보라고 소리쳤습니다. 덕분에 경력 8년 차 운전자에게 가기 싫어하더니 제일 좋아한다고 한소리를 듣고 말았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한 번 고조된 기분은 항구에 도착한 뒤로도 쭉 상승세였습니다.



원래는 간절곶에 가려고 했어요. 독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곳. 그런데 거기는 부지런한 사람만 갈 수 있잖아요. 출발이 늦은 우리는 고속도로가 막히는 모습을 보고 방향을 틀었어요. 그리고 칠암항이라는 처음 보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마음에 들었어요. 테트라포트를 앞에 두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옆에 선 프로질문러가 언제 해 뜨냐고 20번쯤 물었을 때 일출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고되었던 7시 33분. 바로 그때 해님이 수면 위로 뾱하고 떠올랐습니다.


뾱. 이 말 외에 그 상황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의성어가 있을까요. 정말 태양이 '뾱'하고 나왔다니까요. 마치 깨트린 껍질에서 계란 노른자가 쏙 나온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요. 전 태양이 그렇게 뜨는지 몰랐어요. 좀 더 천천히 올라올 줄 알았다구요. 아마 제 머릿속은 일몰을 상상하고 있었나 봐요. 일출이나 일몰이나 한 글자 차인데 뭐가 그리 다르겠냐고요.


네. 일몰과 일출은 천지차이였습니다. 좁쌀만 하던 노란색 덩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몸뚱이를 키우더군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이미 환해진 세상을 끊임없이요. 눈동자에 검은색 반점 자국이 점멸할 때까지 처음 마주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가슴속에 커다란 불덩어리를 삼킨 기분이었어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러 오는구나. 새해 첫날부터 세상 이치를 하나 깨달은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달님파라는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른 새벽기상과 매서운 겨울바람이 싫었던 거죠. 낯간지러운 새해목표와 사랑을 나누는 말들이 부담스러웠고요. 따뜻한 집에서 밤에 새해를 맞이하는 현명한 사람인 척 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알게 되었죠.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구요. 막히는 고속도로를 뚫고 바다를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작년에 삼킨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있었겠지요.


저는 새해 일출 직관러 1년 차가 되었습니다. (경력이 1년마다 자동 갱신된다니 럭키입니다.) 내년에는 어디서 어떤 해를 볼 수 있을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물론, 늦잠을 자서 달맞이도 해맞이도 일몰도 일출도 다 놓쳐버릴지도 몰라요. 저의 성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아요.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했잖아요. 숙면을 취한 전신에는 맑은 피가 돌 거고 새해 아침을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긍정적인 마음으로 앞을 바라보자구요. 적당히 웃고 적당히 울고 적당히 쓰면서요. 은유 작가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성공이 아니라 건강한 성장'이니까요. 적당히가 제일 어렵다는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자신에게 제일 맞는 옷을 찾아 입기로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 마음속에도 첫 빛이 스며드는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세상이 밝아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깨닫겠죠. 세상에 의미 없는 하루는 없다는 걸요. 오늘도 그 하루 중 하나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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