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밑 집인데요. 좀, 조용히 해주세요.
네? 저희, 집에 돌아온 지 30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요.
......
그리고 방금까지 식탁에서 저녁 먹고 있었어요.
흔하디 흔한 실내복과 헤어스타일. 처음 보는 아랫집 아주머니는 나와 신장이 비슷했다. 쉽게 마주한 시선 사이로 경직된 눈매만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초인종 소리에 놀라 같이 들고 나온 젓가락을 얼떨결에 보여드렸다. 의심스러운 눈빛이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못했을 리 없다는 확신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한층 상냥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넸다.
다른 층에서 난 소린가 봐요.
..... 네.
나는 인내심 있게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길 기다렸다. 잠깐의 정적을 타고 아주머니의 한숨이 문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해하신 걸까. 짧은 대답과 알 수 없는 표정만 남기고 그녀는 사라졌다. 식탁으로 돌아온 얼떨떨한 표정을 보고 아들이 물었다.
엄마, 누구예요?
아랫집 아줌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오셨나 봐.
무슨 소리?
글쎄? 다른 층에서 들린 소리 아닐까?
옛날에는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알 만큼 이웃과 가깝게 지냈다는데 요즘은 어떨까. 적어도 우리는 이사떡을 돌리지도, 옆집과 살갑게 지내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층 사람을 만나면 아이 교육상 인사를 건네는 게 다였다. 아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올라가는 숫자만 맘속으로 따라 세곤 했다.
튼튼하게 지은 아파트인 줄 알았는데 여기도 층간소음이 있구나. 아주머니도 참 힘드시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밥술을 떴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이사했지만 소음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요즘은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도 일어난다던데. 사회면을 장식하는 불온한 사건들을 떠올렸다. 돌아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그날 하루는 꺼림칙하게 마무리했다. 마치 카레 얼룩이 옷에 묻은 듯 찝찝했다.
문제는 다음 날 저녁이었다. 밥을 차려 먹고 아들은 숙제를,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운동때문에 다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런데 또다시 인터폰이 울리는 게 아닌가. 화면 속 아주머니의 얼굴이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메두사와 눈을 마주한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아니, 이 집이 맞다니까?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열린 현관문을 잡았다.
뭐가요?
쿵! 쿵! 소리 내는 거!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 지금 설거지 중이고, 애는 조용히 숙제하고 있는데요.
어제와 같은 옷의 아주머니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서 있었다. 사나운 표정 너머 분노를 직면하자 억울함에 목이 메었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 집에 돌아온 지는 대략 한 시간. 이렇게 화가 날 만큼 우리가 시끄러웠을까. 아니다. 시곗바늘을 돌이켜 생각해 봐도 짚이는 건 없었다.
내가 예전에도 한 번 올라왔었잖아요.
아가씨랑 좀 닮은 사람이랑 애 한 명이 있었는데.
저랑 닮은 사람이면 저희 언니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우리 집은 아니에요.
나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려요.
귀가 예민하거든.
발만 끌어도 귀에 소리가 팍 들어오니까.
그런데 이건 그런 소리가 아니야.
신발장 문을 쾅, 닫거나 의자로 쿵, 내리치는 소리 같은 게 들린다니까.
우리 아니라는 항변에도 아주머니는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언제 이사 왔냐, 예전에는 이런 소리가 안 났다, 내가 참다 참다 올라온 거다, 등등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그녀의 눈에는 희뿌연 독기마저 서려 있었다. 저번에 나눴던 짧은 대화에서는 몰랐는데 이 지방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한 억양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제는 그저 당황했다면 오늘은 귓가가 슬며시 달아올랐다. 이사는 1년 전에 왔다, 그럼 1년이나 소음을 참으신 거냐, 정확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 건지 말해달라, 앞으로 주의하겠지만 모든 소리가 우리 집에서 난다고 생각지 말아 달라. 나는 지지 않고 아주머니의 말을 반박했다. 수평을 달리는 서로의 입장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사이를 가로막은 철문의 두께만큼 팽팽한 견해차였다.
억울했다. 저녁으로 먹었던 미역국이 몸속에서 불어 식도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일을 쉬고 있긴 했지만 자주 함께 외출했다. 일정이 끝나고 아이를 픽업하면 보통은 저녁에야 집에 돌아왔다. 밀린 가족 간의 시간을 쌓으려 주말에도 온종일 나가 있는데, 이렇게 항의를 받을 만큼 우리가 시끄러웠단 말인가. 더구나 방금 아주머니가 올라온 시간대의 우리는 맹세컨대 조용했다.
귀가한 남편에게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상하네. 뭔가 착각하신 거 아냐?”라는 말을 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니 와 닿지 않았으리라. 의심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초리가 머릿속에 박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휴대전화를 뒤적였다. 그러다 문뜩 아주머니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내가 예전에도 한 번 올라왔었잖아요.
다른 지방에 사는 언니가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 자고 가곤 했다. 잠시 아이를 맡긴 사이 아랫집 아주머니를 만난 게 틀림없었다. 언니라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지만 확인은 없었다. 이 늦은 시간에 답이 올 리가 없지, 하고 체념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전화를 뒤집었다. 억지로라도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부디 아주머니가 하루빨리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으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오해가 풀린 그녀가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한결 나아진 기분과 함께 순식간에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잔 여파를 온몸으로 느끼며 허리를 일으켰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어스름한 방 안을 비추는 화면 불빛 아래로 언니의 답장이 보였다.
처음으로 아랫집 사람이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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