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남편이 배를 타는 동안에는 최대한 절약하는 삶을 산다. 외식을 줄이고 여행은 가지 않는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도서관이나 공공장소의 이벤트를 최대한 활용한다. 새 물건을 사기 전에 쓸만한 중고 용품을 검색하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닌다. 남편은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때문에 한 사람분의 생활비를 오롯이 저금할 수 있다.
대신 그가 배에 내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억눌렀던 소비 욕구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동안의 금욕생활은 육지에 발을 딛고 생활하는 3개월을 위한 수도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0끼 중에서 한 끼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
육지에 발을 디딘 남편이 외쳤다. 배에서 나오는 식사는 한계가 있어 결국은 같은 메뉴를 지겹게 먹게 된다. 신선한 식재료의 보관이 어려워 냉동식품과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요리사인 시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미식가인 남편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그의 식욕은 폭발한다.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고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을 고민한다.
나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남편의 욕구에 맞춰준다. 아들이 생긴 후에는 둘이서 먹고 싶은 게 다를 경우 (즉, 대부분의 경우) 중재하는 중직을 겸하고 있다. 식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여행욕이다. 그가 배를 탄 순간부터 가족여행을 설계한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면 가고 싶은 곳의 목록을 만든다. 리스트를 보고 여행 경로를 짜는 건 남편이다. 길눈이 밝은 남편은 자신이 찾은 맛집을 추가해서 완벽한 일정을 위해 몇 번이고 수정을 더 한다.
우리는 오랜만에 오사카에 다녀오기로 했다. 팬데믹 이후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다. 밀봉한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잠들어 있던 설렘을 꺼내 들었다. 아랫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3일 전에 찾아왔었다. 언니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데 그녀는 도대체 누구와 얘기를 나눈 걸까. 우리 집과 아랫집 사이에 평행우주라도 존재하는 걸까. 고민하면 할수록 의문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아니다. 일단은 눈앞의 여행에 집중해야지. 꺼림칙한 생각은 반듯하게 개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우리는 3주 동안 집을 비웠다. 즐거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피곤과 아쉬움이 함께 한다. 지인에게 줄 선물로 트렁크는 꽉 찼는데 마음은 어딘가 허전해서 돌아오는 택시 안은 조용했다. 일탈의 도파민은 찰나였고 공항에 도착한 순간 사그라들었다. 종알거리던 아들은 엄마의 싱거운 대답을 몇 번 듣더니 스르륵 잠이 들었다. 내일부터 다시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는구나. 아쉬워라.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말끔하게 빗나갔다. 여행 후의 나른함을 풀기도 전에 둔탁한 벨 소리가 공기를 두들겼다. 아랫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저녁에 재등장했다. 이번에는 남편을 대동하고서.
실례합니다. 아랫집에서 왔는데요.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온화한 표정부터가 아내와 달랐다. 마른 체구 덕분에 한층 커 보이는 키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흰머리가 섞인 두상과 미안함이 엿보이는 입가가 양해를 구하고 있어 현관문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아저씨 뒤에 있는 그녀의 무표정에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집 남편도 등 뒤로 다가왔다. 마치 2:2 싸움을 벌이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아군을 뒤에 업고 팽팽한 기류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우리 아내가 좀 예민해서요...
윗집에서 자꾸 소리가 난다는데
죄송하지만, 집 안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요구에 불쾌함이 앞섰다. 그렇게 예민하면 차라리 주택에서 살 것이지 왜 공동생활을 하는 아파트로 와서 이 난리인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영 달갑지 않았다. 아저씨는 대답을 기다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해 보이던 그의 인상마저 달라 보였다.
짜증과 답답함이 뒤섞인 채로 차라리 다 보여주고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걸로 정말 끝이 날까? 아니면 또 다른 트집을 잡을까.'라는 짧은 의문이 스쳤다. 하지만 잠깐의 번거로움으로 이 지긋지긋한 갈등이 해결된다면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활짝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집 안쪽을 향했다. 그렇게 아랫집 부부를 집 안으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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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밀리의 서재 "아랫집에 미친 여자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