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남편은 상냥한 사람이다. 붙임성이 좋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빈번한 이사로 삶의 터전이 불안정했던 만큼 애정결핍 증세가 있다. 결혼 후 나아졌지만, 여전히 거절을 어려워하고 가끔 호구 같은 행동을 해 내 속을 태운다. 그래도 욱하는 성미가 있어 화가 나면 무섭다. 상대방이 예의 없는 사람이라 생각되면 단칼에 관계를 끊는다. 길게 설명했지만, 결국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다는 뜻이다. 단, 그 사람이 예의만 지킨다면.
말로만 듣던 아랫집 아주머니를 실제로 대면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역시나 호의를 장착하고 살가운 미소로 우리 집 투어를 시작했다.
마음껏 둘러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거실, 안방, 작은방, 서재를 옮겨 다니며 집을 소개하는 뒷모습이 당당했다. 아랫집 부부도 조금씩 긴장을 풀고, 어색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놓여있는 가구와 의자를 끌어보며 거기서 나는 소음을 시험했다. 로봇청소기에 관심을 보이고 얼마나 자주 청소기를 돌리냐고 묻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사람은 집에 있는 물건만 보고 굉음의 원인을 알 수 있다는 건가. 자기가 초능력자야, 뭐야. 결국은 사람 탓하고 싶은 거지, 뭐.' 못마땅한 내 마음도 모르고 남편은 커피를 타서 두 사람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제가 글을 써요.
컵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계속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요.
직업이 작가신 거예요?
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면 어찌나 놀라는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절실한 눈빛이었다. 어찌됐든 이 사람의 괴로움이 끝나야 나의 괴로움도 끝날 것 같았다.
글 쓰는 방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클래식을 틀어도 좋을 것 같고요.
아니면, 집 근처 도서관에서 작업하시면
더 집중이 잘 되지 않을까요?
아주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해봤어요.
개 산책시키면서 기분 전환도 해보고
잔잔한 클래식도 틀어놓고.
그런데도 그 소리만 나면 집중이 딱 끊겨요.
그럼, 거기에 신경이 쏠려서 작업이 안 돼요.
방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어디서 나는 소린지 찾고 다닌다니까요.
그렇게 예민하면 작업실을 따로 마련해야죠. 왜 생활공간에서 이러고 있습니까. 하지만 나는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렇군요."라고 답했다. 속내는 달랐지만, 싸우자는 게 아니니 참을 수밖에. 내려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리며 질문 상대를 바꿨다. 아저씨는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입을 열었다.
남편분은 어떠세요? 소리가 많이 나나요?
저는 그다지..
공사장에서 일하니까 소리에 둔해요. 일하고 오면 잠자기 바쁘고요.
머뭇거리는 아저씨의 말을, 아주머니가 가로챘다. 결국 미스테리한 그 소음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당신 한 명뿐이라는 거다. 파도에 씻겨나간 범죄 현장을 보는 심정으로 답답한 추리를 이어갔다.
혹시 저희 발소리일까요?
아니에요.
발소리나 애들 뛰어다니는 소리 같은 건 괜찮지.
사람 사는데 그런 소리 날 수 있잖아요?
우리도 개 키우고 있으니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살아요.
근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갑자기 의자로 내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요.
오늘 보셨다시피 소음이 날 만한 물건은 저희가 가진 게 없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의자를 내려치거나 하지도 않고요.
저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어요.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우리가 그럴만한 사람으로 보이냐는 물음에는 한탄이 섞여 있었다. 그동안 입주자 카페에서 검색해 본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탐문을 이어갔다.
옆 건물처럼 보이지만 여기가 3, 4라인과 이어져 있잖아요.
혹시 옆 동 소리가 전해진 건 아닐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오죽했으면 내가 공사장에서나 사용하는 헤드셋을 하고 지낸다니까.
이게 머리를 꽉 조여서 얼마나 아픈데.
그러니까 아주머니는 가장 쉽고 방문하기 좋은 윗집만 주야장천 찾아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 집이 제일 만만한가 싶어 울컥하는 찰나, 남편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는 집에 없을 때가 많아서요.
소음이 난다면 저희도 궁금하니까,
혹시라도 또 들리면 그때 시간을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우리도 원인을 찾아보니까요.
말씀하신 층간소음위원회에도 문의해 보세요.
적극 협조할게요. 힘드시다는 건 알겠어요.
저희도 최대한 조심하려고 노력할게요.
소음의 출처는 찾지 못했고, 아주머니의 말과 행동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조심하고 서로 이해하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거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저런, 힘드셨겠군요, 하고 상대방의 고통에 동조하면서도, 모든 소음을 우리가 만드는 거로 생각지 말아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문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하는데 퍼뜩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어제 해외에서 돌아왔는데! 그동안의 소음이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좋은 찬스였다.
저기요! 오늘 말고 최근에는 혹시 소음 어떠셨어요? 2, 3주 동안요.
계속 났지.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세요.
조금 덜 했던 것도 같고....
그래도 큰 소리는 계속 났어요.
나는 그것 보라는 듯 밝아진 얼굴로 외쳤다.
저희가 3주 동안 일본을 다녀왔거든요.
3주 동안 낸 소리는 저희가 낸 게 아니에요.
뭐 하시면 여권 보여드릴게요. 도장에 날짜가 찍혀있으니까.
남편이 몸을 돌려 여권을 가져오려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유, 맞겠지~
그런데 이상하네.
뭐... 아무튼, 내려가 볼게요.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문을 닫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괜찮겠지..?" 라는 나의 중얼거림에 남편은 찻잔에 남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보증수표라도 되는 양 안도감이 번졌다. 그래. 괜찮겠지. 이제 괜찮을 거야. 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반 이상 남은 커피를 내려다보다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수챗구멍으로 빨려드는 검은 물을 바라보며 그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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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밀리의 서재 "아랫집에 미친 여자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