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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시즌2

<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by 유영해

다음날 우리 부부는 마트에 들렀다. 의자 밑에 붙여놓은 패드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테니스공을 사서 끼웠다. 층간소음 방지 슬리퍼도 가족 수대로 준비했지만, 남편도 아이도 열이 많아 금방 벗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둘을 앉혀놓고 내가 고안한 '뱀처럼 걷기' 기술을 전수했다. 마치 거실에서 스키를 타듯 발을 살살 밀면서 걸으면 소음이 나지 않았다. 둘은 어이없어했지만, 슬리퍼를 신을지, 뱀처럼 걸을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자 얌전히 뱀을 택했다. 사이좋게 발바닥을 끌고 다니는 아빠와 아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예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다시는 인터폰 소리에 가슴이 철렁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온 가족이 조심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어느 오후, 우리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려 영화관 분위기를 만들고 늦은 점심을 준비했다. 매운 라면과 치킨윙을 해치우고 야무지게 아이스크림까지 챙겨 소파에 다시 앉았다.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에 키득거리고 있는데, 거실 귀퉁이에서 자고 있던 인터폰이 갑자기 깨어났다. 밝아진 조명과 소리에 놀라, 입속 단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902호에서 호출 신호가 왔습니다.


아랫집이었다. 무슨 일로 우리 집을 호출했는지는 뻔했다. 너무 뻔해서 숨이 막혔다. 소파가 기우뚱했다. 유조선이 침몰한 듯한 거실을 가로질러 인터폰 앞에 섰다. 남편이 영화를 멈추는 사이, 굳은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조용히 좀 하라고!!!!!!!


아주머니의 고함이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떨림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한번 악몽이 시작되는 건가. 그사이 달려온 남편이 화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는 매사에 친절하지만, 가족이 무시당하는 순간을 그냥 넘어갈 정도의 호인은 아니었다.


지금 '야'라고 했냐고요!


남자와 여자의 고성이 액셀을 밟은 듯 속력을 더했다. 마치 아우토반을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 같았다. 긴장으로 어깨가 뻣뻣해진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말만 하지 말고 치세요! 지금 당장 내려갈 테니까!
와 봐라, 쳐줄 테니까!


상황 파악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작은 화면을 사이에 두고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흥분한 남편은 말릴 새도 없이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 아랫집 문을 두들기는 그를 뜯어말렸다. 그 사이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가 툭, 튀어나왔다. 뜨거운 공기가 두 사람분의 노여움을 타고 복도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쳐 보세요! 한 대 쳐보시라고!
내가 못 할 줄 알아? 어?
그러니까 해보시라고. 말로만 나불대지 말고!
그래, 이리 와 봐라, 쳐줄게!


이성을 잃고 오가는 말마다 불씨가 되어 싸움을 키웠다. 남편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둘의 간격을 벌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의 가슴을 반대쪽으로 밀어냈다.


진정해. 내가 해결할게. 내려가서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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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실랑이 끝에 간신히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옆집에서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경찰이 오게 됐을지도 모른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주머니와 대면했다. 이유야 어쨌든 남편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으니 사과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를 여쭈었다. 원인은 뻔했다.


아니, 쿵! 소리에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니까 사람이 진짜 돌 것 같아!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니까요.


도돌이표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얼굴에 체기가 올라왔다. "우린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그 소리는 우리가 낸 게 아니에요."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통하지 않을 걸 알기에 무고를 주장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믿어줄까.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차가운 복도에서 다리는 저리고 머릿속은 텅 빈 듯 멍해졌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짖어대는 강아지를 어르며 얘기하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반대로 그녀가 쏟아내는 감정에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유순해진 상대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그게 잘 안돼서 예민해졌나 봐. 미안해요.
지금 딸내미가 파리에 놀러 갔는데, 같이 간 친구랑 싸웠다잖아.
그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 그쪽도 자식 키우고 있으니까 알 거예요.


알긴 뭘 알아, 이 여자야. 기가 막혀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반박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겨우 힘을 내서 말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예민하실 때는 집에만 있지 마시고
근처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글을 써보는 건 어떠세요?
아이~ 내가 내 집 놔두고 어딜 나가.
다른 곳은 불편해서 못 가요. 집이 좋지.


그 좋은 집, 나도 편하게 살고 싶다고 이번에는 소리 내어 응수했다. 결국, 서로 조심하고 이해하며 살자고 저번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올라가는 계단이 멀미가 난 것처럼 울렁거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더니 친해졌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 정도로 공을 들여 말벗을 해드렸으니, 한동안은 조용하시겠지. 이제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몇 번쯤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차가운 난간을 동아줄 삼아 몸을 일으켰다. 지친 머리는 더 이상 소음의 출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주머니의 평온이 오래 지속되기를,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는 일이 줄어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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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밀리의 서재 "아랫집에 미친 여자가 산다."

<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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