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 창작 지원 프로젝트 당선작
일본에서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 남편이 배에서 군 복무 기간을 채우는 동안, 나는 도쿄의 한 부동산 회사에 취직했다. 사무실은 고층빌딩 12층이었다. 창밖의 햇살이 노곤했던 일상의 오후. 갑자기 책상 끄트머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지진은 그림자 같아서, 보이지 않아도 늘 거기 있다.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책장 가득 꼽힌 서류철이 서로의 몸을 밀어내며 덜컹거렸다. 하나, 둘씩 땅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황급히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진폭은 점점 커져 책상조차 좌우로 흔들렸다. 이 모든 게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격렬한 진동이 잦아들자, 계단을 내려가 대피했다. 번갈아 움직이는 두 다리가 엉킬 듯 후들거렸다. 전화는 먹통이고 지하철은 중단됐다. 길거리에는 부서진 유리조각과 콘크리트 덩어리가 나뒹굴었다. 사택까지 1시간 반을 걸었다. 편의점 매대는 사재기로 텅 비어 있었다. 밀려드는 인파가 살아있는 해일 같아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다.
여진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많은 외국인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일본 사회 전체가 불안으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졌다. 불확실한 정보의 바다에 매몰된 마음은 매일 조금씩 깎여나갔다. 결혼 날짜가 정해지자, 고민 끝에 일본 생활을 정리했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몸과 마음으로 깨달은 1년이었다. 그랬었다. 그랬었는데.
아랫집 아주머니는 24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찾아왔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퍼지는 거대한 진동에 몸이 휘청거렸다. 지진과 다른 점은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인사도 없이 눈앞의 형체를 노려봤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얇게 언 한강물 같던 마음이 격랑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졌다. 왜, 또 무슨 일이시죠? 이 미친 아줌마야.
소리가 또 나서...
아주머니는 어제와 다른 내 표정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럼에도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당당한 피해자를 자칭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소리가 나면 귀를 틀어막든가, 밖으로 나가든가. 이사를 하든가, 정신과를 가든가!
움직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 서재에서 돌아가는 건조기가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 공간이 부족해서 나중에 설치한 이 기계가 소음의 원인일까. 위태롭게 풀려가는 이성을 있는 힘껏 붙들어 맸다. 잔뜩 가라앉은 어조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 혹시 건조기에서 나는 소린가요?
아니, 그런 소리 말고! 내가 딱 집중해서 글이 좀 써지려고 하면 어떻게 알고 쿵! 소리가 난다니까! 마치 지켜보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아줌마..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린지는 아줌마가 더 잘 알지 않아요?
그럼, 누가 아줌마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우리 집이? 그게 가능해요?
이 아줌마는 미쳤다. 전형적인 피해망상이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눌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려웠다. 저 여자의 편집적인 시선이, 부풀린 과장이, 무표정과 표정을 넘나드는 얼굴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어투까지도. 내 인내심은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분노와 함께 단전에서 퍼져나갔다.
가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인터폰도 누르지 마세요.
하실 말씀이 있거든 경비실을 통해주세요.
아줌마 때문에 아주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서늘한 어조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주춤주춤 등을 돌렸다. "집에 사람이 있어도 소리가 나네."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랫집 여자는 사라졌다. 그대로 지옥으로 꺼져버려라. 터지기 직전의 화산은 시뻘건 용암을 내뿜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 가슴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거친 숨을 헐떡였다. 이대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땅이 꺼지는 절망 속에서 몸은 부서진 잔해처럼 주저앉았다.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책상 밑에 숨어있던 대지진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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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밀리의 서재 "아랫집에 미친 여자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