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허상, 가능하다는 믿음
완전한 공감과 이해라는 것이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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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MBTI의 T와 F를 예로 들며 공감능력을 묘사하며 농담을 던진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던 IQ(지능지수) 보다 요즘은 EQ(공감지수)의 중요성을 많이 거론하는데, 나는 공감의 중요성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해봤다.
“타인에게 완전한 공감과 이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공감’이란, 타인의 감정과 인식, 그리고 그 감정이 형성된 맥락 까지를 1:1로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동정이나 유사한 감정의 공유가 아닌, 타인의 내면을 그대로 겹쳐보는 일이다.
세계인구가 82억을 돌파한 지금, 그 중 완전한 공감을 할 수 있는 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가정사와 세상을 겪어왔고, 다른 지역에 살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기본적인 마인드부터 판이하게 나뉘는 것이 사람이다.
각각의 인격에는 고유한 우주가 있고, 그것을 색으로 나눈다면 세상에는 적어도 82억개의 색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개미가 아니다. 사회라는 군집 생활을 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도 개개인의 사고회로는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타인이 자신의 고민이나 하소연을 늘어놓았을 때, 아무리 그것이 본인이 겪어본 것과 비슷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대입해 타인에게 공감을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공감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인식, 반응, 기분 등등이 상이하고, 심지어는 사건이 일어난 시점의 공기의 흐름과 분위기, 소음 같은 것 또한 기억에 반영이 되어 기억에 남는데, 이를 완벽히 알고 대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종종 창작물에서 기억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마법이나 기술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게임 ‘사이버펑크2077’의 BD(brain dance) 기술이 있는데, 이는 촬영자의 뇌를 데이터로 스캔기록을 하고, 사용자가 뇌에 직접연결을 하여 플레이 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완전한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의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기술적 복제일 뿐이다. 감정의 데이터가 전송된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감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제된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그림자일 뿐이다.
결국 공감이란, 뇌의 신호가 아니라 ‘자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식의 문제다.
사람은 왜 공감과 이해를 원할까?
그저 자신의 고통을 공유하여 결론적으론 동질감을 얻기 위한 행위일까?
고립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던 기나긴 고대시절에 DNA에 각인된 ‘소속감’이라는 생존본능 일까?
하지만 인간은 앞서 설명했듯 온전한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사건을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대입하여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일 수 밖엔 없다.
이를 깨닫게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공감과 이해를 바라지 않게 되고, 현실적이고 유용한 조언을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린다.
완전한 공감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스치며 살아간다.
어쩌면 공감이란, 불가능하다는 그 사실 속에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