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과도기2

착취와 기만, 선택의 기로

by 승환

직전에 올린 글과 반대되는 시각을 써보려 한다. 논란은 서로의 입장을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화두를 던지고 사유를 확장하려 할 뿐,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가름하려는 것은 아니다.


AI의 남용이 기존의 예술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AI는 결국 기존의 작품들을 학습하여 결과물을 뽑아낸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은 누구의 것이고, 기존 작가들의 땀과 노력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이는 명백한 무단 착취와 불공정한 경쟁이고,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내가 만든 제품을 멋대로 가져다 섞어 ‘특별 비법소스’ 라며 팔아 돈을 번다면, 나라도 속이 끓지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소비자에 대한 기만이다.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비용을 지불한다. 동시에 시간을 투자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흔적과 작가의 고유한 경험을 찾는다. 하지만 작가가 AI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겉보기에 새로운 창작물처럼 보여도, 사실상 기계의 자동생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은 작가의 노력과 고통의 산물을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기계적 조합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명백히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일전에 예를 든 루다이트 운동과 쇄국 정책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이 그런 운동과 정책을 펼쳤던 이유에는 아주 타당한 사유가 있다.

19세기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은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과 업무환경은 최악으로 치닫았고,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일을 하는 아동노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쇄국정책은 외세가 몰고 오는 새로운 사상과 물자가 내부 질서를 흔드는 것을 막으려는 방어였다. 이는 자국의 문화와 전통, 체제를 지키려는 본능적 움직임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것이 언제나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선 길고도 힘든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내부의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발전을 거부한 이유는 어리석음이 아닌, 두려움과 생존본능에서 나왔던 것이다.


AI 창작은 예술의 새로운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가 이를 자신의 창작물로 내세울 때 그것은 소비자 기만이 된다.


예술은 결국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소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I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단순한 텃세가 아니라, 예술과 소비자 사이의 신뢰를 지키려는 정당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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