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원숭이들이다.

원숭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선택하는 법

by 승환

이 지구는 아름답다.

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 푸르른 행성에서 개성 넘치는 생명체들과 자연경관들을 보다 보면 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

이 LSD 냄새나는 머릿속에 꽃밭이 피어 버린 히피들의 망상 같은 문장이 문제다.

이 세상은 추악하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말하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모여 이룬 ‘인간의 사회’ 를 말한다.

권력이 올바르게 작동한다고 믿는가?

자본이 정당하게 흘러가며 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는가?

사람들이 믿고 행하는, 법의 근간이 되는 윤리와 도덕이 지당하다고 믿는가?


여느 철학서, 자기계발서에서 흔히들 말하는 ‘비판적인 시선’ 을 장착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자,

이 세상은 원숭이들을 줄 세워 그 중 몇몇 원숭이들에게 힘을 쥐어 주고는 그 힘을 무분별하게 휘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것이 과도해서 대중들이 그 윗선의 원숭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거나, 그 힘을 윗선들에게 휘두르지 않는다면 그 원숭이는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열심히 그것을 휘두른다.

법대로

법이란 원숭이들이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힘의 정당성이다.

불교에서

시법평등 무유고하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라 했다.

“법은 높고 낮음이 없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깨달음이라 여겨진다.”

이건 종교를 배제하고 본다면 개소리다.

그 당시에도 그 법을 만든 권력자는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탓에, 그 법을 위반해도 아무런 제제가 가해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법은 사회의 최정상층에 의해 논리 정연하게 짜여 졌지만 허점은 존재한다.

완벽할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이 만들었으니,

그래서 원숭이가 힘을 무분별하게 휘둘러도 뭐라고 할 자가 없을 뿐 더러, 그 원숭이는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법이라는 매뉴얼 대로 행동하니까!

그리고 대중들은 그 힘을 쥐어 준 사회를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존재가 고개를 들어 소리를 낸다면?

허점 많은 법을 수호하라는 사명을 받은 원숭이가 힘을 휘두른다.

심지어 더 가관인 부분은, 원숭이가 그렇게 제멋대로 힘을 휘둘러도 그것에 기시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중들조차 태반이 원숭이들이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 말하면서, 사회를 더 낫게 만들겠다고 말하는 존재들도 원숭이가 아니라고 믿는가?

이 말을 하는 나는 원숭이가 아니라고 믿는가?

우리는 모두 원숭이들이다.

난 원숭이가 되기 싫다.

그래서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우리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은 아주 좆 같은 무간지옥이다. 세상 어느 곳을 가도 똑 같은, 비슷한 사회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니.

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하늘이 푸르다는 이유로, 나무가 싱그럽다는 이유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인식하고 행복감에 젖은 표정으로 들판에 누워 낮잠을 청하고 싶다.

그런데 인간이 되려면, 비판적인 시선을 장착하는 순간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행복한 원숭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은 두 개의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오류다.

행복한 원숭이는 지옥을 보지 못해서 웃는 것이고,
불행한 인간은 지옥을 본 뒤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운다.

인간이 진화한다는 것은 행복을 얻거나 비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본 눈으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이 능력은 원숭이에게 없고, 대중에게 없고, 권력자에게도 없다.

지옥을 보았다는 이유로

세상이 지옥으로만 보이는 순간,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현실을 부정하는 행복한 원숭이가 될 것인가,
현실에 굴복한 불행한 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옥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부분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세 번째 존재가 될 것인가.

나는 그 세 번째를 선택하겠다.
그것 만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또 다른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세 번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을까?


간단하지

LSD(환각제)를 하면 된다. 그럼 세상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

.

.

농담이다.

그리고 이 농담이 핵심이다.


시산혈해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의 그릇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
무간지옥을 인식하면서도
태연하게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여유.

비극을 정확히 직시하고도
그 위에서 농담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인간.


현실을 모르는 자는 멍청하게 웃는다.
현실에 짓눌린 자는 울기만 한다.
현실을 정확히 본 자는 웃지도 못한다.

하지만 현실을 넘어서 웃는 자가 있다.

이건 니체의 조롱(Spott)이고,
부코스키적 블랙 코미디이며,
카뮈의 반항적 웃음과 같은 계열이다.

지옥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도
비틀어 웃을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불굴의 해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