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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Apr 07. 2023

09. 하루살이, 밤에 대한 기억

[에세이] 그때 꿈을, 다시 꾸었다

“너는 다시 와서 / 바다에 떨어져 반짝이는 햇살처럼 / 내 눈을 멀게 했어

내가 자유를 느끼는 순간 / 달이 네 얼굴을 창턱에 드리워

너를 잊을 때마다 / 네 눈이 내 심장에 출몰해 가만히 떨어져

그러니까 안녕 / 다음에 네가 올 때까지

드디어 내 눈에 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 어맨다 해밀턴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식물에게는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하루살이에게는 낮이 밤으로 바뀌는 하루 동안에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무서운 변화가 찾아온다. 그해 겨울 내게도 하루살이가 느끼는 공포가 찾아왔다. 한국에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어둠으로 바꿔 버렸다. 이것은 폐장과 동시에 모든 불이 꺼져 버리는 놀이공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도 앞으로 가야 할 목적지도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어둠속에서 덥석 물리고 할퀴고 찢기면서 결국 나라는 존재는 해체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도전이라고 여기며 대했던 인생이 허무한 도박으로 결론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대학에 자퇴서를 내면서 어렵고 길었던 준비 기간과 다르게 모든 것이 너무 쉽고 빨리 끝나 버렸다.


  내게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뜨겁게 데워져 있던 심장을 스스로를 진정시키는데도 시간이 필요했고 이곳을 떠나기 전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과제를 하며 같이 밤을 샜던 대학 친구들과는 인사로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섭섭함을 달랬다. 그러나, 나를 늘 가족처럼 대해주었던 필립과 벨리리 부부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마지막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무한하다고 여기며 대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의 소중한 기억들이 이제 가위질하여 내 몸 이곳 저곳을 오려낼 것만 같았다. 내게 힘을 내라며 필립이 노래 가사를 내 귀에 대고 흥얼거렸던 웃음 나던 기억도, 벨러리가 미소와 함께 용기를 내라며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일에 대한 잔잔한 기억도, 피핀이 꼬리를 흔들며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는 눈을 응시하며 체온을 나누어 주던 그때의 기억도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의 이별은 46 Bingham Rd에서 조용히 끝이 났다.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낮이었음에도 유난히 어두웠던 기분이 든다. 우리는 거실 테이블에 둘러 앉아 말도 행동도 모든 것을 아끼고 또 아꼈다. 벨러리는 굳은 표정으로 이미 식은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필립은 한 손으로 볼과 수염을 만지다가 더는 못 버티겠는지 거실을 나가 뒷마당으로 갔다. 그러고는 쪽문을 통해 쓰레기통을 밖으로 내 놓으며 평정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애쓰는 듯 보였다. 그런데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이다. 나는 이것을 기억해내려 여러 차례 노력도 해 보았지만 마치 이별이 존재하지도 않은 듯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또 어떻게 46 Bingham Rd을 나왔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이 공항버스가 있는 터미널까지 갈 수 있게 주황색 콜택시를 불러준 것 같지만 이 마저도 나는 확실하지 않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가루가 되어 있었다.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고 도전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무기력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무기력의 광활한 뱃속에 들어가 끝없는 시간과 혼돈을 겪어야 했다. 필립과 벨러리 부부는 전화와 편지로 자기들과 주변의 안부를 전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렇게 되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나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우리의 관계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속에 어두운 터널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것이 끝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어두운 터널의 속을 거치는 통과의례를 치르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어둠이 가시지는 않는다는 것도 같이 배웠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보니 내 스스로가 두개의 머리와 두개의 심장을 여분으로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두 개가 안된다고 한다면 절대로 고장 나지 않고 멈추지 않는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것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것이 지나 버린 그때의 일들은 후회로 남는 이유이지 않을까? 내게는 필립과 벨러리 부부와의 관계가 큰 후회와 미련으로 남았다. 과거를 회색의 추억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한번은 컬러로 과감하게 색칠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 이미지 출처: https:// www.bournemouth. co.uk/things-to-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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