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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Apr 01. 2023

08. 길들여진 이삭과 같았던 여행과 추억

[에세이] 그때 꿈을, 다시 꾸었다

“야생 곡물의 이삭의 가지는 잘 부러진다.

익으면 씨가 이삭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어져 번식할 수 있다.

반면 작물화 된 곡물의 이삭 가지는 질겨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익은 뒤에도 씨가 그대로 붙어 있다.

야생에서라면 번식하지 못하면서 이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바로 제거되었을 것이다.”

- 생물학자 앨리스 로버츠

 


  동전에도 양면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한다. 내가 46 Bingham Rd에서 필립과 벨러리 부부와 같이 있는 동안에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안 좋은 일들이 찾아왔고 이것은 연이어 찾아왔다.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문장처럼 행복할 때의 모습은 모두 비슷해 보이다가 불행할 때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안 좋은 일은 서로 모양도 달랐으며 어떠한 경고도 배려도 없어 보였다.


  그날 아침은 전화를 내가 받았다. 내가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한참 동안 전화가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에서 아버지와 살고 있는 필립 동생의 전화였다. 나는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필립에게 전화를 바꿔 주었다. 그런데 필립과 벨러리 두 사람은 이어서 외출 준비를 했는데 집안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몇일이 지나 둘은 다시 조용히 반나절 정도를 다녀왔는데 둘의 드레스 코드는 평상시와 다르게 그들의 표정만큼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것이 장례식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들은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여간해선 내게 잘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필립의 수술 역시도 그랬다. 이 일 또한 아무 말이 없었기에 나는 하마터면 그가 멀리 출장을 갔을 정도로 여길 뻔했다.


  그런데 출장이라 여겼던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배터리를 분리해 차량이 방전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창고에서 몇 가지를 찾아 옮겨 달라는 등의 출장 치고는 이상한 부탁이 있어 의심은 커져갔다. 이렇게 몇 일이 더 지나고 벨러리와 필립의 병문안을 갈 수 있었다. 그곳은 멀리 시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들 깊숙이 돌러 쌓인 종합병원이었다. 우리는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바꿔 타고 굽이져 있는 긴 복도를 한참 걷고 서야 그가 있는 병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필립은 여러 대의 모니터와 장비들에 둘러 싸여 침대 깊숙이 누워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는 아무일 아니라며 하얗게 바뀐 손바닥을 들어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는 심장에 다시 이상이 생겼고 이를 위해 페이스 메이커를 새것으로 바꾸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심장이 멈추었다 다시 뛰는 수술 때의 그래프를 꺼내 보이며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퇴원해 일상으로 돌아온 필립은 장치가 다시 자리를 잡느라 예전보다 불룩해진 가슴 때문인지 좋아하는 마라톤을 한동안 하지 못했다. 마치 고속열차가 종착역에서 차고지를 찾아 가는 듯 필립은 나이든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한번은 평상시와 다르게 필립이 내게 아주 정중히 부탁을 한적이 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결혼 기념일에 맞춰 베니스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게 개와 고양이를 몇일 돌 봐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의 진지한 질문에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고 바로 ‘No’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의 놀란 얼굴에 대고 나는 몇일이 아니라 일주 정도면 가능하다고 대답하면서 크게 같이 웃었다. 잘 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여유 있게 다녀오게 하고 싶었고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내게 먼저 물어봐 줘서 고마웠다.


  그런데 필립과 벨러리 부부가 둘만의 여행을 다녀와서 내게 깜짝 선물을 내밀었다. 그들 부부와 같이 휴가를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나의 휴가 일정에 맞추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가까운 곳을 여행하거나, 집안 행사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같이 휴가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몇일 동안 짐을 나누어 트렁크에 실었고 그들이 아끼는 피핀과 푸르도가 먼 길을 넓고 편히 갈 수 있게 뒷자리에 쿠션도 만들었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달려 웨일즈의 한적한 농가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규모와 시설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옛날 그들이 둘이 처음 살았던 신혼집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농가 숙소 주변은 언덕과 산들로 둘러 쌓여 있었고 양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매일 개들을 데리고 트레킹을 했으며 저녁이면 근처 레스토랑으로 나가 식사를 즐겼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내게 베풀어준 고마운 선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 이미지 출처: https:// cprw.org.uk /news-and-events/farm-support-is-vital-for-the-landscape-and-communities-of-rural-w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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