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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Jun 17. 2023

03. 도각도각, 멍 때리는 자유를 얻다

[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나는 선배를 15년 전 처음 만났다. 내가 선배와 일본 출장을 가게 되면서였다. 원래 계획에는 출장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내가 운 좋게 다른 사람을 대신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늦게 합류하다 보니 출장에 관한 준비가 거의 끝난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선배와의 제대로 된 만남은 출장 날 공항에서 이루어졌다. 급하게 이루어진 만남이다 보니 나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나리타 공항을 거쳐 신주쿠까지 가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출장 스케줄이 특별하지 않은 듯 선배와 가 출장에서 특별히 친해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우리는 여느 출장과 출장자들처럼 낮에는 박람회를 보고 저녁에는 각자의 보고서를 준비하는 평범한 출장이었다. 그런데도 선배와 내가 친해지게 된 데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도보 여행을 같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낮 동안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모두가 호텔로 돌아가 개인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배와 내가 둘이 남게 되면서 이야기와 술자리로 이어졌다. 선배는 사회 생활에 경험이 많았고 일본 출장도 여러 번 다녀오다 보니 모르는 게 많았던 내게 좋은 배움의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선배는 긴 시간을 내게 할애하며 좋은 곳과 내가 모르는 것을 찬찬히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 여정은 학생이 인심 좋은 노교수를 멀리 학술회를 따라가서 겪을 법한 일같이 느껴졌다. 트렌드를 찾고 배우기 위해 떠난 출장이지만 거기서 우리는 마음을 내려 놓고 힐링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는 일본의 오래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되고 불편한 것에 놀라고 즐거워했다. 마치 새롭고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면서 느리고 불편한 것에 감춰져 있던 소중함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후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우리는 오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두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호텔을 나갔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나는 처음 간 일본에서 좀 더 깊이 둘러보고 싶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관광 지도를 받아 펼치고는 가고 싶은 목적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낮 익은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선배였다.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것이다.


“너~ 여기 잘 모르지. 내가 데려다 줄게.”

“같이 가자. 대신~ 우리 같이 걷자.”


이렇게 말하고는 선배는 앞장서서 호텔을 빠져나갔고 나는 대답 대신 선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의 도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공기와 상쾌함도 좋았고 신주쿠 도심으로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도 좋았다. 처음엔 내가 매일 출근하는 곳이 아닌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곳으로 출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급기야 내가 이곳 사람이 된 듯한 착각까지 들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 직장인들 틈에 껴서 제법 표시 나지 않게 인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초록색 신호등에 맞춰 제법 익숙하게 순서대로 좌우를 살피고 길을 건너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긴 시간을 도심의 고가도로와 빌딩들이 엉켜 있는 대로를 따라 걸으니 외곽의 제법 한적한 곳까지 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배의 안내를 받아 찾아 간 곳은 메이지 신궁이었다. 선배는 그곳에서 자갈로 된 길과 호수를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길이라는 본성은 사람이 지나다니기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지만 이곳은 여느 길과는 개념이 달라 보였다. 길의 중간이 볼록하게 솟아 있어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면 길 위의 자갈들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려오는 구조였다. 선배는 이것까지도 수행의 과정으로 삼아 계속 비질을 해서 자갈을 원래의 위치로 올려 놓는다고 했다. 볼록하게 길을 만드는 것도 그리고 볼록하게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에도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한 사람이 이 길에 배려하는 마음을 담았다면 다음 사람이 이 길에서 감사하는 시간의 순환 고리를 만들어 냈다.


선배와 나는 누군가가 만들어준 배려에 감사하며 볼록한 길을 걸어 조용한 호수로 갔다. 그리고 평평한 그곳에 앉아 긴 시간을 보냈다. 마치 이것은 처음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편안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어색하고 또 미안한 시간이기도 했다.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장소에서 낯선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그 시간 그곳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멍 때리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정말 큰 행운이었고 꿈 같은 일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호수를 앞에 놓고 약속을 했다.


“우리 나중에 다시 여기에 오자.”

“그때도 똑같이 걸어와서 이렇게 멍 때리다 가자고~.”


> 이미지 출처: https://www.timeout.com/tokyo/things-to-do/best-nature-parks-escapes-attractions-in-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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