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kb 하우스 Jun 10. 2023

02. 우리의 여행은 조금 이상하다

[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선배와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네이버 지도를 열어 일본 여행을 대신할 코스를 찾는데 집중했다. 러프하게 생각한 것은 서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찾아 간 숙소 근처에서 전통음식을 놓고 술을 한잔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주변 경치를 천천히 산책하고 돌아오는 일정이면 좋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15년전 일본 여행에서 느꼈던 정취를 아쉬운 대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아내에게 여행 계획을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여행에 상상하지 못했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울로 가는 건 어때, 종로도 좋을 것 같은데?’하며 아내가 기발한 제안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선배와 내가 서울에서 15년 전 일본 여행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이 가능 해졌다. 그리고 서울에서 신주쿠와 하라주쿠를 추억하는 데는 분명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은 곳을 찾아가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여행이 한국에서 즐기는 일본 여행이라는 새로움과 재미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렇게 선배와 나는 일요일 오후 인덕원역에서 만났다. 우리는 재촉하지 않았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만났다. 만나고 보니 우리가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의 드레스 코드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선배는 검정색 자켓에 검정 구두를 나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왔는데 이것은 과거 우리가 일본 출장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둘이 만나자 마자 단번에 함박 웃음을 터뜨린 것도 서로가 이것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시작부터 생각지도 못한 재미들이 곳곳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미는 어떤 것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여행은 마치 마술상자가 펼쳐진 공간 같아 보인다.


우리의 여행은 조금 이상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둘은 정말 많이 이상한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의 여행이 이상한데는 여행에 목적지가 없이 하루 종일 걷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선배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걷기인데 이것을 선배가 자의로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것은 늦은 걸음걸이로 맞춰 적당히 걷다가 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걷기 시작해서 식사와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냥 계속 걷기만 한다. 이처럼 우리의 여행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선배는 인생을 살면서 일본 여행 때 제일 많이 걸었다고 했는데 이번도 그때같이 걷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장소만 일본에서 서울로 바꿀 뿐 모든 걸 그대로 따라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계획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걷고, 운치 있는 다른 길이 보이면 그곳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러다 힘이 들면 길가 아무렇게나 벤치에 앉아 쉬고 또 배가 고프면 바로 식사를 하는 순서였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미리 정해 놓은 것이 한가지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 여행 마지막날 경험했던 것과 같이 자연과 역사가 담긴 곳을 걷는 것이었다. 우리는 창덕궁에 있는 후원을 그 후보지로 미리 정해 두었다.


이번 여행이 좋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선배 역시도 말과 표정에서 신나 있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이야기에 서두가 필요했고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지하철에 오르자 마자 선배는 오늘 할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우리는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수많은 이야기로 시간을 채워 나갔다. 우리의 여행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여행을 어디서 시작할지는 온전히 지금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는 마치 특수요원이라도 된 듯 어디로 침투하여 서울을 제압해 나갈지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로 가려면 종로5가로 바로 가면 되지만 이렇게 되면 작전이 너무 시시하게 끝나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본 여행객이 제일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명동을 시작점으로 정하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연이지만 계획대로 우리는 일본인 가족 관광객들의 뒤를 따라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명동의 골목은 일본인들이 많아 정말이지 우리가 신주쿠를 걷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계획이 틀리지 않은데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와 나는 평범하지 않은 시간에 평범하지 않은 관계가 되면서 이곳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가끔 서울을 여행하며 이런 기분을 느껴보자고 약속을 했다.


> 이미지 출처: https://wallpapersbook.com/harajuku-background-download-collection/harajuku-background-11/

작가의 이전글 01. 우연을 가장한 계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