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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Jun 24. 2023

04. 최고의 한해였다

[에세이] 우연히 나란히 여행하다

1991년 운 좋게 대학을 입학하면서 내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초등학교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본 게 전부였던 내게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복잡하거나 붐비는 곳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기에 시골과 작은 도시를 떠나는 것부터 내게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적응해야 했고 당장 크게 맞닥뜨린 문제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혼자 다녀본 적도 없는데다 어떻게 다니는지도 모르니 모든 것이 깜깜하게 느껴졌고 서툴기만 했다. 어릴 때 혼자 시내를 갔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었고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놓치고 다른 버스를 타는 바람에 말못할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게 되면 내가 앞장서기 보다 누구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나의 대학 생활 역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꼭 혼자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면 친구들과 함께 다녔고 친구들을 미리 만나 익숙하게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교양 과목으로 신청한 한국사 수업을 계기로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것에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스스로 이것을 바꾸겠다고 작정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수업이 한국의 고궁에 대해 배울 수 있게 되면서 혼자 이곳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그때는 내가 사진 찍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것이 운 좋게 교수님 눈에 띄게 되면서 내 수업에 반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나는 책에서 배운 것을 리포트로 쓰고 시험을 보는 평범한 청강생의 자리에서 벗어나 직접 고궁을 답사해 이것을 사진을 찍어 제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기회였다. 이렇게 되면서 나는 날씨가 좋고 시간이 날때마다 고궁을 찾아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극히 일부이겠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서울을 혼자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내가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고 분신처럼 들고 다니게 되면서 얻은 행운이고 또 교수님이 이를 알아봐 주면서 얻은 좋은 기회였다. 이렇게 얻은 행운과 기회 덕분에 나는 배움이라는 겉면에 머물지 않고 깊숙이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나는 배움에 일련의 과정이 있음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처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는 공부가 선행이 되어야 하고 또 직접 이것을 눈으로 보고 느껴야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내가 배우고 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책을 통해 미리 공부하지 않고 고궁을 찾아 갔다면 모르는 것이 많은 상태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했으면 깊이 있게 들여다 보기는 커녕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 역시 적었을 것이다. 고궁을 다녀와서는 사진을 인화하여 분류하고 비교하는 과정을 거쳤다. 공부로 배움이 끝나는 것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찾아 봐야 하고 이것을 원하는 수준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배움이 완성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하나의 좋은 습관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회상해 보면 그때는 간절해야만 통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좋았던 것들도 많았다. 대학 신입생이던 그때 디자인 전공 수업에서는 다양한 창의성을 필요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경험해야 했다. 그때는 이러한 자료들이 부족하던 때라 우리는 마치 거대한 미션을 수행하듯 시간을 내여 이곳저곳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학기가 시작되면 디자인 서적을 판매하기 위해 대학 강의실로 찾아오는 판매상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디자인 서적을 다른 종류의 것들과 묶어 세트로 팔다 보니 구매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 서적이 제대로 수입되고 유통되지 않던 시기라 원서를 구매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퀄리티가 좋은 카피본을 구하기 위해 을지로 주변을 찾아 다니곤 했다.


디자인을 시작하는 학생에게 화구는 또 하나의 필수품으로 전공 과제마다 다른 화구와 종이를 사용해야 했다. 화구를 한 번에 구비할 수도 있지만 아직 어떤 것이 필요하고 좋은지를 몰라 그때 그때 과제에 맞춰 필요한 것을 하나씩 장만해 나갔다. 종이를 고르고 자르는 일은 말 그대로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때는 내가 원하는 사이즈로 잘라주는 한가람 문구를 단골로 찾아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모든 것에 몸을 움직이고 발 품을 팔아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으면 이것을 주문을 하고 다시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기다리고 물건이 들어오는 날짜에 맞춰 찾으러 갈 때는 기다려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어 좋았다. 마치 물건에 생명이 있는 듯했고 그래서 이것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은 더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지금 다시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는지가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그때만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고, 배워 보겠다고 열심히 따라다니고, 유행에 따라 멋을 부리던 그때의 그 뜨겁게 일렁이는 열정이 나는 아직도 그립기만 하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72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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