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PT 손자병법 _ 작은 것의 화려한 반란
> CASE1: 오사카성, 난공불락의 타이틀을 무너뜨리다
[Overview] 나무는 한 해의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경쟁이서 뒤쳐지게 됩니다. 작년까지 차지했던 공간을 다른 나무에게 빼앗기면서 그로부터 성장이 느려지게 됩니다. 길고 느린 내리막 길을 걷게 되면서 결국 설 곳마저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사카성은 정치적으로 두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시대가 권력의 상징으로 일본 통일 원정의 교두보의 역할을 했다면, 도쿠가와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변혁을 추구했다 할 수 있습니다. 결코 함락되지 않을 만큼 가장 완벽한 성을 지어 지키고자 했던 도요토미의 바램을 상대로 철옹성과도 같은 성을 차지하기 위한 도쿠가와의 긴 경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일본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년 ~ 1598년)는 옛 이시야마 호간사가 있던 부지에 3년간의 공사 끝에 권력의 상징인 오사카성을 완성합니다. 오사카성은 서쪽은 바다, 동북쪽은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입니다. 여기에 12km가 넘는 성벽과 깊이 11m 폭 30m의 해자로 둘러싸면서 최강의 방어력을 가지게 됩니다. 전쟁에 대비해 10만 군사가 몇 년을 먹고 싸울 수 있도록 철저히 대비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은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의 주인이 됩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오사카성을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년 ~ 1616년)에게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는 천왕에게 군사 지도자인 쇼군의 칭호를 받아 영향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시작하지만, 어린 히데요리를 상대해야 하는 노령인 이에야스의 행동에는 어떠한 서두름이 없습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성에 막대하게 쌓여 있는 재물을 소진 시킵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명분으로 긴키 지역의 신사와 사찰을 신축하고 수리할 것을 건의하면서 비용을 늘립니다. 이것으로 재물이 소진되었다고 판단한 이에야스는 그동안 기다려왔던 전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난공불락의 타이틀에 걸맞게 수차례의 공격에도 오사카성을 함락하지 못합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는 화친을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만, 여기서 이에야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전세를 바꾸어 버립니다. 쇼군인 그가 그냥 철수하면 명목이 안 서니 해자를 메우게 해달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데요리가 이를 승낙하면서 그동안 지켜지던 난공불락이라는 오사카성의 타이틀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자가 사라지면서 오사카성을 이에야스가 점령하고 히데요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로써, 자자손손 번영을 꿈꾸며 히데요시가 세운 난공불락의 오사카성과 함께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가 바꿔버린 지형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립니다.
> CASE2: 링크 트레이너, 프레임을 재구성하다
[Overview] 프레임은 카메라의 뷰 파인더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기도 하고 상황을 대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데 우리는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 폭풍의 위험 상황에서 항공 우편 배달을 강행하면서 미 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은 전쟁과 무관하게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종사 교육이 원인이 되어 1934년 겨울에만 9번의 항공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비행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이 조종을 잘할 것 같은 학생을 골라 비행기에 태워 원 그리기와 옆 돌기를 해보고 멀미를 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발된 조종사는 몇 주간의 지상 교육을 마치고서야 비행기 조정 장치를 조금씩 배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원시적인 교육은 25프로라는 높은 사망률이 보여주듯 누가 보아도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링크가 찾아냅니다.
에드워드 링크(Edwin Link, 1904년 ~ 1981년)는 뉴욕 빙엄턴에서 기술자인 아버지에게서 피아노 공장일을 배우며 자랍니다. 열 여섯 살에 비행기에 빠지게 되면서 그는 비행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대형 원을 그리는 루프와 동체를 옆으로 돌리는 스핀이 그가 배운 비행 교육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에 의문과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교육에 새로운 프레임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년 후 그는 피아노 공장에서 ‘링크 트레이너’를 만들어 시계 비행과 계기 비행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항공기에 장착된 계기에만 의존하는 계기 비행은 미 육군항공대에 꼭 필요한 교육이었음에도 활용되지 못합니다. 그가 만든 링크 트레이너 역시 시골 장터에서나 탈 수 있는 놀이기구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다, 1934년 뉴저지 방위군에 대여했던 링크 트레이너의 성능 시험을 의뢰 받는 행운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이 요청에 링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와 비바람을 뚫고 직접 그곳으로 날아가면서 링크 트레이너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입니다. 이를 계기로 대량 주문으로 이어지면서 1만대의 링크 트레이너가 제작됩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까지 50만명의 비행사들이 실전과 동일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947년에는 항공대가 미국 공군으로 승격되면서 에드워드 링크는 제트기, 폭격기, 아폴로 착륙선까지 비행의 연습 범위를 확대시켜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