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2021년 가을의 끝자락에서 다음해 여름까지의 일로,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온 부모님에 관한 짤막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프리즘을 통해 비춰지는 아름다운 빛줄기와도 같았던 여든을 넘긴 나이에 이들이 보여준 용기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삶터를 정리한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가혹한 상황이지만 이들은 변화를 찾아 나감으로써 조용한 가르침을 보여 주었습니다.
타지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시골은 연휴 때가 아니면 작정을 하고서야 갈 수 있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만큼 고향도 집도 추억의 장소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지에 살고 있는 친구들 몇몇은 시골 생활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추억을 잊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복귀하는 시점에 맞춰 지금 장소에 자리를 잡으면서 운 좋게 타지에 대한 이질감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모락산 가까이에 아파트를 얻으면서 누리는 행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중교통의 도움 없이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이고 산세 또한 아기자기 해 부담이 없다 보니 주말이면 자주 찾고 있습니다.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모락산 초입으로 가는 길은 단독주택들이 펼쳐져 있어 마치 동화 속 풍경 속의 운치를 자아냅니다. 빨간색 벽돌집들이 담장에 싸여 있는 이곳은 내가 기억하는 곳과 닮은 것이 많습니다. 막다른 골목 같지만 막상 걸어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길과 이어져 있는 것도 비슷하고 담장 너머로 집집마다 다른 나무와 꽃들이 자라는 모습까지 나의 시골과 비슷합니다. 결과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오면서 이곳에서 나중에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모습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이곳에 재개발 플래카드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집 두집 떠나고 거대한 가림막에 둘러 쌓이면서 아파트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추억이 담긴 장소는 우리를 행복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일일이 사진을 찍거나 저장하지 않아도 장소가 우리를 추억하고 있다는 것은 설렘과 함께 보물섬과 같은 동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우리가 살던 곳을 찾아 보물지도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옛추억을 그리며 우리가 살던 아파트를 순서대로 답사한 것입니다. 10평 조금 넘는 아파트에서 시작한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서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위층 할머니의 고약한 텃새, 염색공단의 악취, 그리고 겨울 추위로 못쓰는 방과 같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악재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가 살던 아파트며 애들이 다니던 어린이집 여기저기를 본능 반 기억 반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시간도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이사를 많이 하게 되어 추억만큼 낯섦도 많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격양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은 기억하는 게 많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어린시절을 함께한 소중한 기억과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에게 평생을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어주지 못해 많이 아쉽고 또 많이 미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