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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Sep 19. 2022

09. 올터너티브 스페이스

[에세이] 나는 퇴사에 실패했다

  충정아파트는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빌딩들이 높다란 담벼락으로 막고 서 있어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이처럼 접근이 어려우니 두발로 걸으며 찾아다니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았습니다. 마치 나는 충정아파트의 초록이 에펠탑인양 골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초록이 얼마나 보이는지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장소마다 다른 깊이와 여운을 찾듯 난간에 올라 보기도 하고 담벼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기도 하며 충정이라는 곳이 나중에 나의 가슴을 탕탕 칠 수 있게끔 기억에 담았습니다. 골목길은 숙명과도 같은 운명으로 세월의 칼날에 몸뚱이가 잘리면서 대로와 빌딩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은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생명체 와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나같이 초행길이라면 막다른 골목이 군데군데 숨어 있어 골목길에서 길을 헤매기 십상이지만 작고 소박한 옛모습을 볼 수 있어 정감이 갑니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느라 이것저것을 살피고 옹기종기 들어선 집을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곳 사람들은 도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실사 같은 모습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향기를 묵묵히 담고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골목 안 언덕을 오르다 보면 와인바 충정원(충정로4길 5-18)이 한옥 마당에 펼쳐져 있습니다. 파리 골목의 노점 카페를 연출한 듯하지만, 한참 보고 있으면 오히려 파리의 골목이 우리의 것을 가져 간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밤을 배경으로 한옥에서 조촐한 잔치가 벌어진다면 이곳의 모습과 많이 닮았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삼삼오오 둘러 않아 처마를 따라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 웃으며 올려다보는 밤의 낭만을 즐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낭만적인 장소 옆으로 삐뚤한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삐뚤어질 테다’를 하얀 현수막에 써 붙이고 일하고 있는 삐뚜르 공방(충정로2길 24)입니다. 가죽공방인 이곳은 삐뚜름한 모습이 오히려 변하고 바뀌는 세상에서 지킬 건 지키겠다는 소신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커다랗게 유리로 뚫린 공방은 더 엄숙하고 위엄 있게 느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난 정직하지 않아요’하는 말이 ‘난 정직해요’보다 더 진심으로 다가왔습니다.


  도로변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충정각(충정로2길 8)은 입구 푯말만 보면 이곳이 어딘지 혼돈을 자아냅니다. 조심스레 안쪽을 기웃거리고 오래된 서양식의 2층 건물에 궁궐 마냥 붙은 충정원이라는 현판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곳이 이태리 레스토랑이 맞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출입구에는 한국식 정원석과 골동품으로 멋을 부렸고, 빈 와인병을 쌓고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운치를 담아냈습니다. 충정각이 독특한 이름에 이어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입구에 붙은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올터너티브 스페이스를 전시회의 장소로 사용한 게 보기 좋았습니다. 웅장한 미술관을 대신해 일상에다 옮겨 놓은 모습은 포근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미술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공간 이곳저곳을 채우고 설렘을 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멋진 생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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